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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26. 2021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편도 여행자들


모든 출발이 설레는 것은 아니다. 남겨진 이들의 전유 같던 쓸쓸함은 여행자들마저 추격해 회환의 꼬리를 남기기도 한다. 되돌아오지 않으리라 신발끈을 묶는 이의 그림자는 유독 아리다.


다채롭게 치열한 현재의 여성 작가군 중 김초엽 작가에 관한 열광을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첫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시간의 항해 같은 작품집이다. 아름다운 문장과 별개로 작품집 전체가 하나의 시집 같다.

공통되게 흐르는 고적한 정서 때문인지 테드 창과 묶여 언급되던데 읽고 나서 오히려 김보영이나 어슐러 르 귄 쪽에 가깝다고 느꼈었다. 처음 발간된 뜨거운 여름보다 겨울을 목전에 둔 소슬한 밤에 읽었던 기억이 정말 좋았다. 자기 전에 한 편씩 꼼꼼히 읽었는데 적당히 따스한 진공 속을 둥둥 부유하는 기분이었다.



사랑이 그 사람과 함께 세계에 맞서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구전으로 전해지는 전설처럼 시작되는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동화적 감성에도 안이하지 않다. 무결한 사랑을 위해 세계를 열고 닫는다는 점은 만화가 유시진 작가의 작품이 연상되기도 했다. 보호 속에 안주할 생각이 없는 소피는 가출한다.


“이렇게 쓰여 있구나.” 할머니는 그 부분을 읽을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이 씩씩함을 넘겨받은 <스펙트럼>은 새벽에 귀 기울이게 되는 목소리 같은 작품이다. 거듭된 탈피에도 변하지 않는 본질을 이해하고자 다가서는 이들은 배척이 아닌 연대를 택한다. 그 단정한 다정함으로 작품집 내에서도 뜨겁게 사랑받는 작품이다. 길고도 짧은 조우 속에 루이가 남긴 유산을 품은 채 희진은 귀환을 준비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그리워하는지 모르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유년의 인격형성을 초지능과의 공생으로 풀어낸 <공생가설> 속 초자아들은 우리 안에서도, 어떤 한 시기 안에서도 완전히 옮겨간다.


예전에는 헤어진다는 것이 이런 의미가 아니었어.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너무 오래 지연된 여행자의 이야기다. 우리들의 영원이 결국 고전적 가치 지향에 있는 것인지, 그 답을 찾아 안나는 영속성과 한시성 사이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담긴 눈물이 아니라 단지 눈물 그 자체가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감정의 물성>은 감정의 형상화를 통해 관습화 되는 전이를 그린다. 보현의 우울로 대표되는 감정은 옮겨 다닐 뿐 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실체가 없는 것일수록 감각으로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 증명은 결국 온전한 이해나 소통에 대한 갈구인지 모른다.


삶은 단절된 후에도 여전히 삶일까.

<관내분실> 속 이미 떠나 버린 누군가는 자발적 실종을 선택했다. 실종자를 끝끝내 추적하는 이는 한 가지에서 뻗어 나온 존재로서 자신과 그를 받아들인다. 그것이 자기 연민이 될지 회의가 될지 아직 더 두고 봐야겠지만 다음 단계를 위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조우가 있는 법이다.


자유를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이등시민으로서의 여성이 각자 최초의 사람이 되는 여정을 그린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는 덤덤해서 더 뜨거운 작품이다. 모든 청소년, 특히 여성 청소년들이 꼭 읽었으면 좋겠다! ‘새로 쓰여진 <인어공주>’란 바로 이런 작품이기 때문이다.



단편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의 주인공과 화자는 모두 여성이다. 결함으로 취급되는 요소를 안고 있는 그녀들은 모두 어딘가로 떠나거나, 떠나기 위해 부유 중이다. 따뜻한 기조에도 어쩔 수 없이 쓸쓸함이 스며든다.

이 단편집의 수록 순서는 담당 편집자에 의해 재정비되었다고 한다. 단편집 발간 전 입소문 난 <관내분실>을 처음 읽었을 때는 멋진 작품이지만 다소 공모전 스타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단편집의 일부로 읽었을 때 꼭 어울리는 제자리로 느껴졌다. 각자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같은 방향으로 모여드는 여행자들의 항해 일지를 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좋은 편집자들의 견인은 새삼 놀랍다.


고요하게 전진하는 김초엽의 그녀들을 보며 진화에 대해 생각해본다. 깨우침으로 우리는 여러 층위의 사유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날 선 부정과 자욱한 회의만 반복한다면 깨우침이 무슨 소용일까.

새로운 시작 앞에 혹은 지난한 모퉁이를 돌고 난 직후 운동화 끈을 고쳐 맨다. 고난이 아닌 모험이 기다리길 바라며 초심자의 행운을 그러모아 출발을 준비를 한다. 누군가와 조우할 수도,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자발적으로 실종될 수도 있겠지만 회귀란 없다. 다시 돌아온다 해도 좌표를 재설정했을 뿐 삶에는 편도 티켓만 주어진다.

단촐하지만 서슴없이 떠난 선발자들의 기억에 기대는 날이 있다. 되돌아오지 않아도 괜찮을 목표지가 있다는 것을 간직한 채 먼지 같은 오늘을, 어쨌든 이 삶을 걸어 나간다.





@출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허블,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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