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어린 시절의 TV는 왜 그렇게 재미있었을까? 어떤 시간은 그런 TV쇼로 각인되어있다. 뭐, 지금이라고 각종 플랫폼의 노예가 아닐 리 없지만 어린 시절의 몰입에는 턱도 없다.
코니 윌리스의 크리스마스 단편집은 정통적이지 않지만 전통적인 분위기를 구사한다. 단어를 비튼 소동들, 유령과 타임워프, 살인사건, 로봇과 외계인으로 크리스마스처럼 느껴지게 한다. 고전 영화와 버터케이크-한국 어린이라면 싸구려 종합과자 선물세트, 구식 선물로 채워진 흐릿한 기억을 아이패드로 보는 기분이다.
코니 윌리스의 2017년도 크리스마스 단편집은 <Miracle and Other Christmas Stories, 1999>에 <All about Emily>를 비롯한 신작을 추가한 판본이다. 국내에는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와 <고양이 발 살인사건> 두 권으로 나뉘어 발행돼있다. (이하 빨간 구두 꺼져!)
의외로 이 단편들이 재미없다는 서평을 종종 보았다. 단편집 한정 너무도 미국적인 분위기와 작품 내 레퍼런스들에 대한 체험 때문 아닐까 싶다. 알고 있는 쇼라 해도 해석으로 이해하는 것과 보고 자라며 체화된 분위기를 복기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으니까.
#춤추는 댄의 크리스마스, 브로드웨이 크리스마스 https://brunch.co.kr/@flatb201/223
표제작인 <빨간 구두 꺼져!>는 인생 영화가 <러브 액츄얼리>인 이의 크리스마스 픽으로는 다소 아쉬울 것이다. 하지만 <캣츠>, 특히 톰 후퍼의 캣츠에 분노한 당신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안데르센의 아름답지만 우울한 피조물-성냥팔이 소녀와 주석 병정들, 눈사람에게 애틋한 지지를 보내는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고전을 사랑하는 이에게도 즐거운 경험될 것이다.
‘클레어 하빌랜드’는 조금 조바심이 나고 어쩌면 지쳐있는지 모른다. 토니 상을 세 번이나 수상한 전설적인 여배우지만 전설답게 사라질 생각은 아직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알고 있다. 이 왕좌가 미세한 고독 속에 풍화되고 있다는 걸. 스타 마케팅이 필연적인 팬덤이 트로피가 된 시장에서 언제든 한 줌으로 흩어질 명예라는 걸.
티켓 매진과 홍보에만 열 올리는 매니저는 오늘도 감언이설을 철철 발라 귀찮은 스케줄을 제안한다. 한 과학자의 조카딸이 그녀를 꼭! 만나보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청탁성 만남은 질색이지만 최근 원하는 배역을 따는데 도움될지 모른다는 내밀한 위기감에 클레어는 스케줄을 수락한다.
매니저가 사소한 홍보라고 강조한 이 만남에는 어째선지 열띤 대규모 기자단이 모였다. 더 의외인 것은 조카딸을 가장한 연예인 지망생이리라 추측했던 상대가 정말 앳된 소녀였다는 것이다. 무해하고 순수한.. 그래..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소녀다운 소녀 ‘에밀리’.
14세 소녀 에밀리가 해박함을 넘어 방대한 뮤지컬과 영화 지식을 열띤 팬심에 섞어 토해내자 그녀가 좋아진 클레어는 느긋하게 범상한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때, 에밀리? 너도 배우가 되고 싶니?”
완벽하게 안전한 질문이었다. 나를 만나겠다고 무대 뒤로 찾아오는 십 대 소녀들은 전부 진지하게 배우가 되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에밀리는 내 질문을 받은 다른 소녀들처럼 “그럼요! 물론이죠!”라고 속삭이지 않았다. 그녀는 말했다.
“아니요.”
‘거짓말.’ 나는 생각했다.
대화가 이어지며 클레어는 문득 그러나 확실하게 깨닫는다. 이 소녀, 놀랍도록 무해하고 매력적인 에밀리가 인간이 아니란 것을. 최근 이슈가 된 AI 프로젝트에서 그녀의 삼촌이라는 박사 이름이 떠오른 것도 같다. 에밀리는 인간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의 안전성을 홍보하기 위한 모델이었고 클레어는 튜링 테스트* 대상자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튜링 테스트: 인간의 것과 동등하거나 구별할 수 없는 지능적 행동을 보여주는 기계 능력에 대한 테스트)
그러나 클레어는 노련한 연기로 인터뷰의 위기를 넘긴다. 마고는 이브의 음모를 폭로하다 되려 가해자가 되었지만** 클레어는 에밀리를 실망시키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고수해낸다. (**마고 채닝과 이브 해링턴: 영화 <이브의 모든 것> 주인공. 극 중 톱스타 마고는 그녀의 열성팬이라던 이브의 음모로 자신의 위치를 잃는다.)
성공적으로 끝난 인터뷰 덕에 클레어의 공연은 연일 매진이다. 그런데 소스라치게 차가운 비가 내리던 날 갑자기 나타난 에밀리가 클레어의 리무진을 두드린다. 빡빡한 일정 중에 도망쳐 나왔다는 에밀리는 전날 보았다는 ‘라디오 시티 로켓 무용단’에 관한 정보들을 열정적으로 토로한다. 알고리즘다운 꼬리물기 브리핑 끝 에밀리의 고백은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다는 열렬한 소망이었다.
노련한 클레어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에밀리는 인간의 직업을 넘보아선 안 되는 ‘인공지능’이지 않은가? 방대한 정보를 가진 조력자일 뿐 인공지능에게 소망이란 것이 있을 수 있나? 무엇보다 ‘무엇을 원하는지도 몰랐던’ 에밀리에게 ‘진정 원하는 오직 한 가지’를 깨우쳐 준 것이 바로 클레어의 연기 인생이라니.
클레어는 역시 알고 있다. 에밀리의 열정은 ‘조성’된 것이다. 비바람에 창백해진 에밀리의 피부 센서처럼.
때문에 클레어는 당혹감 속에서도 에밀리가 로켓 무용단에 입단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에밀리는 예의 바르게 감사를 표하고 홀홀 돌아가버린다. 다음날 클레어와의 만남을 최고의 순간으로 꼽으며 뉴욕을 떠나는 TV 속 에밀리의 표정에 좌절이나 실망은 없다.
결국 에밀리는 소망을 묻어둔 걸까?
<빨간 구두 꺼져!>의 원제는 ‘All about Emily’로 고전 영화를 좋아한다면 번득 알아챌 수 있듯 영화 <이브의 모든 것 All about Eve, 1950>을 패러디 한 제목이다. 원전에 대한 오마주에 두 주인공의 관계를 암시한 선택이다. 좀 더 인상적인 어필을 위해선지 국내 판본은 작품 내 인용문장인 ‘Fuck the Red Shoes! I wanted to be a Rockette.’를 채택했다. 뮤지컬 <코러스 라인 A Chorus Line> 등장인물인 발 Val의 대사 ‘빌어먹을 라디오 시티랑 로케츠! 난 브로드웨이에 설 거야! Fuck you, Radio City and the Rockettes! I'm gonna make on Broadway!’를 비틀었다.
국내 판본은 <빨간 구두 꺼져!> 외에도 여러 타이틀을 손보았는데 로컬라이징이 나쁘지 않다. 다만 1쇄본의 경우 판매 일정을 맞추기 위함이었는지 오타가 무척 많다. (닉 혼비 정도는 그렇다 쳐도 제목을 오타 내다니요.)
All about Emily라는 원제가 심심하다 못해 촌스럽다는 의견도 많지만 이 작품의 레퍼런스가 된 영화를 생각하면 원제에 더 서정적으로 감응하게 된다. 코니 윌리스는 브로드웨이 쇼와 고전 영화 특히 <이브의 모든 것 All about Eve, 1950>과 <선셋 대로 Sunset Boulevard, 1950>를 모티브로, 인용으로, 복선과 반전으로 알뜰하게 사용한다.
<이브의 모든 것> 주인공인 중견의 슈퍼 스타 마고 채닝은 젊고 아름다운 이브 해링턴의 야심과 음모 속에 쇠락한다. 퇴락한 무성영화 시대의 톱스타인 <선셋 대로>의 주인공 노마 길리스는 과거의 영광에 자신의 무덤을 헌정한다. 많이 알려진 대로 차이는 있지만 공통된 정서의, 같은 해에 발표된 두 작품은 동시에 그해 아카데미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투표는 동률이 났고 두 작품 모두 수상하지 못했다.
뉴욕은 여러 번 갔던 곳이지만 라디오 시티의 로켓쇼는 매번 미루던 일정 중 하나였다.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보아두었으면 좋았을 걸이란 아쉬움이 들었다.
로켓츠의 퍼포먼스는 아이돌 칼군무에 익숙한 21세기 한국인에겐 그닥 놀랍지 않을 수 있지만 일사불란 동일한 퍼포먼스와 코스튬이 시그니처인 인기 쇼다. 이런 동일성은 편리하게도 로케츠 바운더리를 넘어서는 모든 다양성을 배제해 차별로 작용해왔다. 시각화를 위한 포지션별 신장 같은 조건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꽤 오랫동안 유색인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작품 내에서도 지적되듯 정확한 기술과 규격화된 퍼포먼스가 생명인 이 쇼에 인공지능만큼 적합한 조건을 갖춘 인간이 있을까? 그러나 기술이 아닌 예술의 영역에서 ‘종’은 조건의 범주에도 속할 필요 없는 필수 요소가 된다. 로케츠 쇼의 인기는 불완전함으로 이루어내는 기예로서 각광받기 때문이다.
<빨간 구두 꺼져!>는 화자인 클레어의 한탄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엔딩에 이르면 클레어라는 배우의 모놀로그 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영광 속에서도 고독했던 클레어는 에밀리를 통해 이 고독함을 얻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스텝을 밟아야 했는지 떠올린다. 기술마저 뛰어넘은 열정은 비록 그것이 조작 가능한 선호도로 치부된다 해도 있는 줄도 몰랐던 누군가의 소망을 자각시킨다. 다른 스텝을 밟는 이들이 떠나온 곳이 사실은 같은 곳임을 깨우치게도 한다.
“하지만.. 저는 이브 해링턴이 되고 싶지 않아요. 그녀는 좋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이브에게 어떤 꿍꿍이가 있는지 마고 채닝이 어떻게 눈치를 챌 수 있었을까?” 내가 물었다.
“그건 이브를 보았을 때 마고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야.”
위 대화 속 클레어의 설득은 작품 후반부 클레어의 진짜 마음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클레어의 예술적 성취를 온전히 알아봐 준 것은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었다. 에밀리를 경계하고 대입하던 클레어는 마침내 자신의 마고 채닝을 선택한다. 위악을 내려놓은 클레어의 토로는 준비된 경쟁자, 그러나 잠재적 계승자, 무엇보다 다음 세대의 그녀 앞에 한 터럭의 거짓도 없다.
데이터로 움직이는 존재가 통계로 인해 고취된 선호도를 꿈으로 발현시킬 만큼 완전무결하다.
코니 윌리스는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서사로 소비되는데 익숙한 성별과 나이에 종의 문제까지 더해 온전함, 공정함을 재해석한다.
결국 이 작품의 두 여성은 서로에게 목소리를 주는 새로운 시대의 인어공주로 느껴진다.
둘 중 누가 마녀인지는 중요치 않다. 이 인어공주는 언젠가 분명 마녀가 될 것이다. 그녀 자신의 목소리를 포기하지 않고도 목소릴 줄 수 있길 바라는.
홀로 고독하게 무대를 배회하던 마녀는 이제 함께 스텝을 밟아본다.
눈이 아릴 정도로 빨간 카렌의 구두나 눈물처럼 반짝이는 탭슈즈 없이도 그녀의 춤은 한결같이 눈부시다.
@출처/
크리스마스처럼; 에밀리에 관한 모든 것 (A Lot Like Christmas; All about Emily, Connie Willis, 2017)
빨간 구두 꺼져! 나는 로켓 무용단이 되고 싶었다고! (아작, 번역 이주혜,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