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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Dec 30. 2021

개의 마음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로 가득하다. 비판은 악의만큼 날카롭지만 종종 낙오한다. 그럼에도 이 빌어먹을 세상을 버티게 해주는 건 냉소가 아니다. 조용하고 꾸준한 선의, 두렵지만 차마 악의를 외면치 않는 용기, 목적 없는 다정함이 꾸역꾸역 오늘의 걸음을 독려한다. 털뭉치 친구들의 의심 없는 애정을 마주하면 신이란 존재가 있다고 믿고 싶어 진다.

혐오가 한 가지에 그치지 않듯 선의 또한 서로를 물들인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은 아동문학가로서의 소명을 어린이에게서 환경과 동물 보호로 이어갔다.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에 평생 전쟁과 폭력을 반대했다. 일러스트레이터 일론 비클란드는 린드그렌의 가치를 열렬히 추종했다. 린드그렌의 수많은 파트너 중 가장 앞줄에서 언급되는 이유일 것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파트너 https://brunch.co.kr/@flatb201/278



티토 Tito

여덟 살의 비클란드는 부모의 이혼으로 외가에 맡겨졌다. 일찌감치 재혼한 아버지는 딸에게 관심 없었고 어머니 또한 양육을 부담스러워했다. 어린 시절에는 누구나  번쯤 홀로 집을 나서는 모험을 꿈꿔본다. 하지만 현실에선  블록 정도에도 어린이들을 위협할 사고가 충만하다. 그런데도 어린 비클란드의 어머니는 딸과 동행하지 않았다. 외가로 향하는 고독한 여정을 함께한 이는 반려견 티토였다.

아이에게는 아득한 시간이었을 기차여행 끝에 내린 정거장은 유난히 길고 길었다. 비클란드가 내린 합살 Haapsalu의 정거장은 당시 북유럽에서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며 러시아 짜르에게 헌정된 곳이다. 목조로 된 지붕과 기둥이 숲을 따라 길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여덟 살의 어린이에겐 아름답다 칭송받는 거대한 투시가 되려 불안을 가중시키지 않았을까? 개는 어린이의 고독을 이해했을까?

어린 개와 어린이는 오도카니 붙어있었을 것이다. 서로의 온기에 의지해.

Haapsalu 정거장


무책임한 부모와 달리 외조부모의 넘치는 사랑 속에 비클란드는 행복한 유년을 보낸다. 유쾌하고 명랑해 친구도 많았지만 그녀의 가장 소중한 친구는 티토였다. 아마도 홀로 양육하던 시기 비클란드의 어머니가 들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티토는 기억하는 가장 오랜 시간부터 함께였다.

우리의 하루에서 멀어 보이는 대의나 정치는 가장 먼저 일상을 붕괴시킨다. 약소국 에스토니아도 세계대전에 동원된다. 군용 비행장 설치가 시작되자 작은 도시는 무지막지한 군인들로 넘쳐났다.

어느 날 티토는 영문도 모른 채 총격당한다. 절뚝이면서도 가족에게 향하던 개는 두 번째 사격에 목숨을 잃는다. 소련군이 대수롭지 않게 치워버린 개 한 마리는 비클란드의 첫 번째 세계였다.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봉쇄된 도시에 공산화의 기운이 드리우자 쇠약한 외조부모는 손녀만을 탈출시켰다. 비클란드는 막막한 바다 건너 스웨덴에 거주하는 이모에게로 향한다. 이번에는 티토도 없이 완전히 홀로.



사멜리 Sammeli

일론 비클란드의 이미지에는 섬광 같은 순간들이 각인되어 있다. 유년시절은 상상력과 더불어 그녀의 자산이 되어주었다. 작품마다 시그니처처럼 등장하는 아름다운 목조주택, 꽃잎 날리는 골목, 장작 더미 놀이터는 사실 스웨덴의 풍광이 아닌 에스토니아의 노란 집에서 출발한 셈이다.

비클란드는 커리어 후반기 드라마 같은 어린 시절을 연작으로 발표했다. 그중 <길고 긴 여행 Den långa, långaresan, 1995>은 작가 로즈 라겔크란츠 Rose Lagercrantz가 비클란드의 사연을 재구성한 창작동화이다. 티토와 함께 한 여정과 일상, 전쟁으로 탈출해 스웨덴에 적응하기까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비클란드는 난민선을 타고 구조된 마지막 여정이 지금도 세계 어느 곳에서 되풀이되고 있다고 단호하게 강조한다.

#로타와 자전거, 좋은 계절 https://brunch.co.kr/@flatb201/160

'티토'가 묘사된 <길고 긴 여행> 독일어 판(좌), 일론 비클란드와 반려견 '사멜리'(우)


작품마다 애정 넘치게 묘사된 동물들에는 티토의 흔적이 배어있다. <길고 긴 여행>이 티토에게 헌정되었다면 비클란드의 오리지널 스토리 <사멜리 연작>은 평범해 보이지만 반려인이라면 이내 마음이 흔들거릴 장면으로 가득하다. <사멜리 어디 있니? Var är Sammeli?, 1995>를 시작으로 비클란드는 반려견인 허스키 ‘사멜리’를 모델로 한 시리즈를 발표했다. 목가적 풍경을 가로지르는 사멜리와 소년 올레의 숨바꼭질을 쫓다 보면 독자가 도착한 곳은 기억이 남겨진 줄도 몰랐던 어떤 행복의 순간이다. 이 시기 비클란드가 즐겨 사용한 혼합 유화가 부드러운 서정성을 한껏 돋운다.

고적하고 거대한 정거장에서 어린 개에게 의지하던 어린이는 그때의 수호를 되돌려 주는 어른으로 자랐다. 마음속에 간직한 개들에게 책 속의 삶을 주어 영원을 선사한 것이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과 일론 비클란드, 사멜리
<Sammeli, Kom!, 2000>



나는 영원도, 영생도 믿지 않는다. 현실의 어떤 부분에 분노하는 근본적인 이유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믿지 않는다 해서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다.

떠나 버린 개에 관해선 좋았던 기억마저 뭉근히 고통스럽다. 미처 쏟지 못한 마음을 여전히 어쩌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이다. 부랴부랴 부연해보아도 이 마음은 주소도 없이 흩어진다. 인간의 애정은 인간의 편의일 뿐 개의 진짜 마음을 알지 못한다.

개는, 모든 순간 아낌없던 마음을 남겨준 개는 이제 영원을 향해 질주한다. 그 달리기가 마냥 즐겁기를 바란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산책한 그 오후처럼.





@출처/ 

Den långa, långa resan (The Long, Long Journey)

Den långa, långa resan, Rose Lagercrantz (Brombergs, 1995, 일러스트 일론 비클란드 Ilon Wikland)

Var är Sammeli?, Ilon Wikland (Raben & Sjogren, 1995, 일러스트 일론 비클란드 Ilon Wik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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