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1
시대불문 어린이들의 작명에는 한결같은 구석이 있다. 주로 외형적 특징에 빗댄 별명들은 불공정하고 유치하지만 직관적이다. 소녀들의 소녀, 초록 지붕 집의 앤 셜리도 ‘홍당무!’란 유치한 공격에 발끈하고 만다.
애정 하는 작품의 후일담을, 그것도 십여 편에 걸친 시리즈로 읽는 것은 몹시 즐겁다. 그러나 시리즈 후반부로 갈수록 우리가 반했던 인상들은 사그라든다. 지나친 주인공 보정은 앤 특유의 생기를 지웠다. 소울메이트 다이애나에 대한 설정은 가혹하게까지 느껴진다. ‘아비릴의 속죄’ 에피소드에서 얼핏 비치듯 다이애나는 무난하고 전형적인 아주머니가 된다. 그것도 살집 있는. 물론 다이애나는 자신의 행복에 만족하고 그녀의 생애는 모범적인 행복의 한 축을 보여준다.
제비꽃 같은 아름다움도 결국 시간 속에 풍화된다는 것일까? 아니면 각자의 행복이 있는 법이라고 타이르려는 것일까? 비슷한 세계를 공유하던 앤과 다이애나의 불균등한 후일담은 내내 찜찜하다.
앤 시리즈는 변주된 미디어마다 골고루 인기 높고 2차 창작도 적지 않다. 시리즈 탄생 20주년 기념으로 프리퀄이 발간되기도 했다. 몽고메리가 쓴 것은 아니고 캐나다 작가 버지 윌슨이 오마쥬 형태로 발간한 <Before Green Gables, Budge Wilson, 2008>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초록 지붕 집에 오기 전 앤의 고단한 유년시절 이야기다. 정말 오랜만에 새로운 실사판 쇼도 방영될 예정이다. 올해 넷플릭스에서 방영된다는 <Anne with an E>는 벌써부터 기대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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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의 인기에 걸맞게 완역 전집이 제법 있지만 모두 정식 발행본인 것은 아니고 번역 수준도 고르지 않다.
우선 인지도면에서 압도적일 <동서문화사 빨강머리 앤 전집>은 직역 같은 번역으로 악명이 높다. 그래도 비교적 생략 없이 원전을 옮겼고 트리비아를 선호하는 독자라면 간간히 등장하는 부록이 본편의 아쉬움을 상쇄해 줄 것이다.
무수한 1권들만 읽다 내가 처음으로 읽었던 완역 전집은 조금 더 오래된 1984년 창조사 전집 복간본이다.
워낙 오래된 전집이다 보니 당시에도 시대성이 느껴지는 어법과 의역이 적지 않다. 그래도 동서문화사 판본에 비해 훨씬 자연스럽게 읽힌다. 역자가 당대 인기 번역가이자 서정적 작품을 주로 발표한 아동문학가 ‘신지식’인 이유도 있을 것이다.
역자 서문에서 의하면 이 판본은 개정판으로 초판은 1963년도 일서 중역본이라고 한다. 영어 원전을 옮긴 것이 아니기에 축약된 내용들이 제법 많다. 조연들의 에피소드는 상당수 생략되었다. 주석도 전무한 편이지만 책날개마다 몽고메리의 에세이 일부가 실려있다.
1963년 초판본은 보지 못했으나 역자 서문에 의하면 표기법과 북 디자인에 있어 대대적 개정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1984년도 판본은 표지부터 그래피티하고 개성적이다. 발간 당시에는 약간 괴기스럽게까지 느껴졌던 한인현의 회화풍 일러스트는 지금 보아도 무척 독특하다.
본문 삽화는 간결하고 감각적인 성인풍 일러스트로 인기 높던 삽화가 이우범이 맡고 있다.
(창조사 전집 표기를 따릅니다.)
ㆍ 1권, 빨강머리 앤 Anne of Green Gables, 1908
가장 많이 사랑받은 첫 번째 본편이다. 연락자의 실수로 일꾼 소년 대신 초록 지붕 집에 오게 된 고아 소녀 앤. 무뚝뚝하고 사교성도 부족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지닌 쿠스버트 남매는 앤에게 연민을 품는다. 때로는 공상 속에, 때로는 엉뚱한 실수 속에 앤은 성장한다. 매슈와 마릴라의 사랑 아래 총명하고 아름답게 자란 앤은 가족과 커뮤니티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ㆍ2권, 앤의 청춘 Anne of Avonlea, 1909
가슴 아프고 급작스런 사건인 매슈의 죽음 후 에이번리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앤의 이야기이다.
사춘기의 예민함과 만난 앤의 상상력은 점점 미묘한 작가적 기질을 나타낸다. 초보 교사로서의 설렘과 자기반성 속에 앤은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젊은 날 사소한 오해로 헤어진 스테판 어빙과 라벤다 루이스의 재회, 프레드 라이트와 사랑에 빠진 다이애나를 통해 소녀시절을 벗어나려는 앤이 그려진다.
ㆍ3권, 앤의 사랑 Anne of the Island, 1915
대학생이 된 앤의 이야기이다. 제목의 아일랜드는 레드먼드 대학이 있는 프린스 에드워드 섬을 가리킨다.
길버트의 사랑이 커져갈수록 앤은 그의 감정이 불편하다. 한창 매력적인 아가씨가 되어가던 앤은 무미건조한 구혼자들로 인해 프러포즈에 대한 로망마저 깨진다. 친구들 중 최고 미인이던 루비 길리스의 사망과 다이애나 결혼도 상실감을 보탠다. 거기다 첫 소설 ‘아비릴의 속죄’가 다이애나의 엉뚱한 지지로 베이킹파우더 회사 공모작으로 당선되자 작가적 자부심에 상처 입고 씁쓸해한다.
더 이상 마음을 숨길 수 없던 길버트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우정과 애정 사이에서 혼란스러운 앤은 거절한다. 상심한 길버트는 앤과 거리를 둔다. 얼마 후 나무랄 데 없는 이상형 로이 가드너를 만난 앤은 그가 진정한 연인이라 여긴다. 하지만 로이에 대한 감정이 낭만적 취향에 관한 자기만족일 뿐임을 깨닫자 그의 청혼도 거절한다.
앤에게 마음의 진짜 방향을 알려준 것은 길버트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평소 좋아하던 헤스터 그레이의 정원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앤과 길버트는 비로소 연인이 된다.
기존의 앤 시리즈를 좋아했다면 여기까지는 그럭저럭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ㆍ4권, 앤의 친구들 Chroncles of Avonlea, 1912
앤 시리즈라기보다는 <에이번리 연대기>에 수록된 단편들이다. 창조사 전집에서는 극 중 시간대를 따라 4권에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앤의 시선을 통해 이전 권에서 배경에 그친 에이번리의 인물과 사연이 그려진다.
<루드빅의 용기 The Hurrying of Ludovic>, <어린 조슬린 Little Joscelyn>, <카아모디의 기적 Miracle at Carmody> 등 인물별 사연으로 구성된 외전격 단편집이다. 다소 정색하는 분위기는 있지만 꽤 재미있다.
ㆍ5권, 앤의 행복 Anne of Windy Willows, 1936
길버트와 약혼한 앤은 서머사이드 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한다. 의대 진학으로 떨어져 있게 된 길버트에게 앤이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서사가 전개된다. 부임 초반 앤은 고아라는 과거 때문에 오만한 지역유지 프링글스 가족과 캐더린 브룩의 견제에 시달린다. 하지만 각자의 사연과 진심을 이해하게 된 이들은 좋은 인연을 만든다.
ㆍ6권, 앤의 꿈의 집 Anne's House of Dreams, 1917
앤과 길버트가 신혼 생활을 시작한 항구 도시 포 윈즈의 이야기이다.
소박한 살림이지만 앤은 그들의 첫 번째 집을 ‘꿈의 집’이라 부르며 행복해한다. 하지만 이 권에서 진짜 꿈의 집이란 ‘그린 게이블즈’ 일 것이다. 극 중 마릴라의 감격에 따르면 매슈의 죽음과 앤의 결혼을 통해 그린 게이블즈는 집으로서의 진짜 정체성을 얻게 된다. 의지할 곳 없던 1권의 초라한 고아 소녀가 가족으로 받아들여지던 순간을 겹쳐보면 마릴라처럼 뭉클해질 수밖에 없다.
ㆍ7권, 어머니가 된 앤 Anne of Ingleside, 1939
포 윈즈에서 이주 후 칠 년 뒤, 잉글사이드에서의 이야기다. 앤과 길버트는 여섯 아이-젬, 월터, 낸, 다이, 셜리, 릴라의 부모가 된다. 시리즈 중 마지막으로 집필되기도 했지만 주로 육아 위주로 전개되는 데다 현모양처가 된 앤의 캐릭터가 따분하다. 부부로서 원숙한 시기에 접어든 앤과 길버트의 사랑은 여전하다.
ㆍ8권, 무지개 골짜기의 앤 Rainbow Valley, 1919
앤과 여섯 남매는 아름다운 잉글사이드에서도 특별한 장소를 찾아낸다. 그들이 ‘무지개 골짜기’라 이름 붙인 곳에 이주해온 메레디스 목사 일가와의 교제 이야기이다.
ㆍ9권, 앤과 마을 사람들 Further Chronicles of Avonlea, 1920
<에이번리 연대기> 속편이다. 전작과 비슷하게 앤과 길버트를 중심으로 에이번리의 여러 인물들과 사연이 펼쳐진다. 에피소드의 수준은 대동소이하지만 몽고메리가 문학적 형식에 변화를 시도한 권이다.
ㆍ10권, 앤의 딸 리라 Rilla of Ingleside, 1921
1차 세계대전 시기 막내딸 릴라를 중심으로 한 앤의 자녀들 이야기다.
전쟁이 청춘까지 만나면 애달플 수밖에 없기에 다른 권에 비해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주인공 릴라보다는 감수성 넘치는 청년 월터와 내성적인 우나의 애달픈 사연, 젬을 기다리는 개 먼디의 에피소드가 인상적이다.
개선의 시도들은 있지만 ‘여자다움’ ‘남자다움’에 대한 관습은 여전히 유효하다. 어린이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분홍색과 하늘색으로 구분되곤 한다.
돌 전후 나의 조카는 검은색 비닐봉지를 무척 좋아했다. 갖은 좋은 장난감을 안겨주어도 아기답게 침 범벅 후 이내 싫증 냈다. 그런데 나풀나풀 거리는 까만 비닐봉지만 보면 혼자 까르르 거리며 한나절을 보내곤 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이 취향을 동심이라고 부르자;;;)
까만 봉지를 레이스처럼 두르던 이 아이는 커갈수록 분홍색을 좋아하고 있다. 분홍색이 퍽 잘 어울리고 조카 보정으로 사랑스러웠지만 역시나 후천적 영향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소녀 시절의 앤은 소녀의 컬러인 분홍색이 어울리지 않아 종종 아쉬워한다. 그러나 몹시도 싫어하던 빨간 머리카락이 그녀의 창의력만큼 독특한 아름다움임을 깨닫게 된다.
이제 곧 앤처럼 무수한 낙관과 공상, 실수와 선택의 세계로 진입할 조카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는 발레리나도 플로리스트도 될 수 있지만 미지를 탐험하는 그 어떤 것도 될 수 있다고. 네가 한때 좋아했던 검은색이 무수한 반사각을 가지는 것처럼 인생은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다고. 수많은 세상의 색깔들 중 분홍색이어도 좋지만 아니어도 좋은 ‘너의 색’을 찾길 응원한다고.
그 색으로 네가 행복하게 빛나길 바란다고 말이다.
@출처/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Anne of Green Gables, Lucy Maud Montgomery, 1908-1921)
빨강 머리 앤 전집 (창조사, 1985, 번역 신지식, 일러스트 표지 한인현·본문 삽화 이우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