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머리 앤 3
<빨강머리 앤> 1권은 에이번리의 폐쇄적 커뮤니티 속 앤의 성장에 중점 두고 있다. 잊을만하면 나오긴 해도 길버트의 출연 빈도는 다이애나보다도 적다. 그럼에도 앤과 길버트의 서로에 대한 긴장과 의식은 주요 인기 요인이다. 시리즈를 거듭하며 평생의 연인 같은 부부로 맺어진 이 커플의 매력은 점차 떨어진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우리가 사랑한 돌발 소녀가 전형적인 중산층 부인에 적응하는 것이 가장 클 것이다.
드라마 <Anne with an E> 속 길버트 캐릭터는 대대적으로 각색되었다. 매력적인 에피소드들도 있지만 원작을 기대한다면 상이함이 아쉬울 수 있다. 드라마 한정 캐릭터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원작 속 길버트 캐릭터의 인기는 자신의 매력에 당당하고 의심 없던 소년이 불현듯 품게 된 감정으로 변화되는 데 있다. 그러나 등장부터 흑기사 포지션인 드라마 속 길버트는 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때문에 대망의 석판 씬에 이르면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에게 벌어지는 일련의 설정도 갸우뚱하게 된다. 원작에서 루비 길리스는 ‘길버트가 하는 이야기들은 앤 셜리가 몽상에 취했을 때와 비슷해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한다. 앤이 길버트와 연인 전에 절친한 친구인 것은 서로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이해하는 감수성에 있다. 궁극적으로 그들을 묶어준 것은 지적인 자존감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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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 어떻게 길버트의 말을 안 듣는 척할 수가 있니? ‘누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 There’s another, not a sister’라는 대목에서 길버트는 너를 똑바로 쳐다보았어.”
“다이애나.” 앤은 도도하게 말했다.
“너는 내 단짝 친구지만 아무리 너라도 그 인간 얘기를 내 앞에서 할 수는 없어..”
시 낭송의 밤, 길버트가 낭송한 문장은 전장의 젊은 병사가 연인을 떠올리며 숨을 거두는 드라마틱한 대목이다. 하필 이 문장에서 앤에게 던지는 길버트의 시선은 너무 또렷한 감정을 내비친다. 그러나 앤은 책을 읽으며 안면 몰수한다. 1권 <Anne of Green Gables, 1908> 내내 냉대를 당했음에도 길버트가 견뎌야 할 굴욕의 역사는 몇 년 더 남아있다.
예상치 못한 1권의 성공 덕에 나온 속편 <Anne of Avonlea, 1909>에서도 길버트의 존재감은 미미하다. 그러나 청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겐 이성간 긴장감이 고조되어 간다.
시리즈 3권 <Anne of the Island, 1915>는 둘의 로맨스가 상세하게 다루어진다. 보편적 매력까지 갖춘 아가씨가 되어가던 앤에게 길버트는 이성으로 다가선다. 그러나 아직 친구와 연인 사이 어디쯤에서 혼란스러운 앤은 길버트의 고백을 거절한다.
“오, 말하지 마, 제발 말하지 마, 길버트.”
“아니, 꼭 해야겠어. 계속 이렇게 지낼 순 없어. 앤, 널 사랑해.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다 할 수 없어.”
“나는… 난 그럴 수 없어. 오, 길버트… 네가… 네가 모든 걸 망쳤어.”
“친구라고! 네 우정은 날 구할 수 없어. 앤, 난 네 사랑을 원해… 그런데 넌 그럴 수 없다 말하는구나.”
“미안해, 용서해, 길버트.”
“용서할 일은 없어. 네가 날 신경 쓴다고 생각했어. 내가 나 자신을 속였나 봐. 그게 다야. 잘 지내, 앤.”
각자 애정공세를 펼치는 구혼자들과 스캔들 속에 앤과 길버트의 마음은 내내 엇갈린다. 그러나 서로가 원하는 진짜 상대를 자각한 이들은 연인이 된다.
길버트는 ‘앤이 석판으로 자신의 얼굴을 후려졌을 때 사랑에 빠졌다’고 고백한다. 맙소사!
앤은 길버트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그에 대한 사랑을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앤이 길버트에 대한 감정을 자각한 최초의 순간은 좀 더 어린 시절, ‘백합 공주 일레인’ 에피소드에서다. 연극놀이 중 물에 빠질 뻔 한 앤은 우연히 지나던 길버트에게 구조된다. 길버트는 자신을 무시해 온 앤에게 거듭 화해를 청한다.
길버트는 흘낏 위를 올려보다가, 도도한 표정의 조그만 하얀 얼굴이 몹시 겁에 질렸지만 역시 도도한 회색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앤 셜리! 대체 어쩌다가 거기 올라간 거야?”
“우리는 일레인 연극을 하고 있었어.”
앤이 구조해준 사람 쪽을 보지도 않고 쌀쌀맞게 말했다.
.. 한순간 앤은 망설였다. 화를 내며 품위를 찾았지만 마음속 저 밑에서는 길버트의 담갈색 눈에 떠오른 반쯤은 수줍고, 반쯤은 열띤 표정이 어쩐지 마음에 든다는, 묘하고도 새로운 의식에 눈을 뜨고 있었다. 그녀의 심장이 재빨리 야릇하게 뛰었다. 그러나 옛날의 지독히도 억울했던 마음이 흔들리던 그녀의 마음을 금세 빳빳하게 돌려세워 놓았다.
이 긴장감 넘치는 텐션!! 기대감 한껏 부풀린 로맨틱한 장면이지만 앤이 변함없는 투지를 내비치자 길버트도 블라이스가 사람답게 냉랭해진다. 인정하기까지 더 오래 걸리지만 이후 앤은 이때를 내내 아쉬워한다. 길버트를 곁눈질로 훔쳐보며 턱이 근사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한다. 길버트의 본격적인 무시 앞에 앤은 전혀 괜찮지 않은 마음을 꽁꽁 숨긴다. 길버트는 길버트대로 앤의 거절에 더없이 낙심했다.
..사실 겉보기만큼 그렇게 앤에게 무관심할 수 없었던 길버트로서는 자기가 보복하듯 쏟아내는 경멸을 앤이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에 마음의 위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딱한 위로라면, 앤이 무자비하게, 계속해서, 그리고 별다른 이유도 없이 찰리 슬론에게 무안을 준다는 것이었다.
소설 속 찰리는 길버트의 경쟁자로는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그러나 그는 에이번리 소년들 중 최초로 앤에게 호감을 보인 소년이다. 앤의 매력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대놓고 감정을 드러낸다. 이때 이미 앤을 좋아하고 있었던 길버트는 정말 속이 쓰렸을 것이다. 길버트는 찰리가 자신만큼 앤의 관심 밖이라는 걸로 셀프 위로를 한다.
시기상으로 훨씬 뒤에 집필된 <Anne of Windy Willows, 1936>는 길버트와 장거리 연애 중인 앤이 보내는 연애편지 형식으로 쓰였다.
<Anne's House of Dreams, 1917>에서 결혼을 앞둔 길버트는 앤과 화해하던 날 밤을 떠올린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돌아오던 그날 밤의 자신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고 고백한다. 신혼이기도 하지만 이때 이후의 길버트에겐 블라이스 집안의 도도함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일상의 앤을 보며 그녀가 자신의 사람이라는 것을 매번 새삼스러워한다. 언제나 소년처럼 아슬아슬한 심정을 담아 앤을 바라본다.
자녀를 여섯이나 둔 <Anne of Ingleside, 1939>에서도 이 커플의 사랑은 지극하다. 중년에 접어들었음에도 과거의 스캔들 파트너-로이와 크리스틴에 대해 여전한 질투와 경계심을 드러낸다. 맙소사! 그만해!
에이번리 공식 꽃미남의 삶을 한껏 누려온 길버트와 달리 앤은 성장하면서 아름다워진다. 상상력 풍부한 앤에게 프러포즈는 오래된 로망 중 하나이다. 그러나 현실의 프러포즈는 처절하다.
#빌리 앤드류스, 실용주의자의 말로
지독하게 실용적인 앤드류스 집안의 빌리는 소설 속에서는 수줍고 착하지만 다소 멍청한 타입으로 묘사된다. 소설 속 빌리의 청혼은 앤이 인생 ‘최초’로 받은 청혼이다. 문제는 자신이 직접 청혼하지 않고 여동생인 제인을 시켜서 물어보았다는 것이다. 청혼의 이유도 농장을 상속받았기 때문이었다. 뭐 건실하게 보아줄 수도 있지만 한 조각도 로맨틱하지 못한 예정된 실패인 셈이다.
제인은 여자로서는 앤을 이해하면서도 정작 청혼을 거절당한 것은 고깝게 생각한다. ‘고아 출신 앤 셜리가 감히 에이번리의 앤드류스 가를 거절해?’ 싶었던 것이다.
드라마의 빌리는 심술궂은 설정을 맡은 걸로 보인다. 만약 원작대로 간다면 빌리.. 애도.
#찰리 슬론, 착각은 국적불문
슬론가는 대대로 눈치가 없는 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의외로 찰리 슬론에겐 여자 보는 눈이 있는지 모른다.
표면상으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에이번리의 소년들 중 가장 먼저 앤을 좋아했다. 앤의 외모뿐 아니라 똑똑한 점에도 매력을 느낀다. 자신의 마음을 내색할 수 없는 길버트에 비해 찰리는 동네방네 앤 좋아요! 를 뿌리고 다닌다.
성인이 된 후 청혼은 역시 실망스러운데 워낙 오래전부터 좋아해선지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다 상처받는다.
길버트에 대한 혼란에 빠진 시기, 앤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찰리와 어울린다. 그러나 애초 찰리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기에 특별한 여지를 주지는 않았다. 제멋대로 착각하고 거절당한 찰리는 일 년 가까이 앤과 냉랭하게 지내다 여자 친구가 생기고서야 관계가 회복된다. 그러나 그 관계 회복은 앤에게 안타까움을 심어주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묘사된다. 물론 앤은 여전히 안중에도 없다.
#로이 가드너, 서브 남주의 매력
그렇다. 앤이 자신의 프린스 차밍! 미스터 롸잇!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완벽한 서브 남주다.
지역 명문가 자제인 데다 예술적 조예를 겸비한 로이는 심지어 외모까지 앤의 이상형에 가깝다. 첫 만남마저 낭만적인데 어느 비 오는 날 우연히 마주친 둘은 첫눈에 반한다.
그러나 정작 로이의 청혼 앞에 앤은 깨닫는다. 낭만적 취향에 대한 자기만족과 연심을 헷갈렸다는 것을.
첫 번째 구혼 전 길버트는 앤의 절친이라는 위치를 최대한 활용해 경쟁자들을 견제했다. 앤의 대답은 거절로 돌아왔지만 이 마음을 버릴 수가 없다. 설상가상 로이의 등장에 완전히 상심한 길버트는 미녀 후배 크리스틴 스튜어트와의 스캔들을 방치한다. 하루하루 앤의 약혼 소식이 들려올까 두려워하던 이 시기의 길버트는 알지 못한다. 외모만큼 취향 중시하는 앤 셜리 양이 로이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것을 말이다.
#샘 톨리버, 대다수 남자의 한결같음
위의 세 명에 비해 많이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마도 앤의 마지막 구혼자이다.
앤이 임시 교사로 지냈던 밸리 로드의 무식한 일꾼 샘은 딱 한번 본 앤을 자기 혼자 아내로 점찍는다. 어느 날 무작정 찾아와 아내와 살 집을 구할 예정이니 결혼하자고 한다. 당연히 어이없어하며 거절하는 앤에게 자신은 놓치기 아까운 남자니 결혼부터 하고 사귀면 된다는 황당한 제안을 한다.
길버트의 재도전을 빛내주려 한 장치일 수 있지만 외모마저 프러포즈에 대한 앤의 로망을 싸그리 깨뜨렸다.
‘딸바보’, ‘상남자’등의 단어는 유독 한국에서 칭찬으로 받아들여지는 단어이다. 어린 딸에게 보호자가 되어야지 왜 유사 연애감정을 품고 포장하는 걸까? 정말 징그러워 죽겠다. 심지어 이런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근사한 남자인 줄 착각하고 집적대기까지 하는 모자란 남자들, 너무 흔하다.
길버트 캐릭터가 인기 있는 것은 품위 있는 순정 때문이다. 이제는 사라져 판타지가 된 것이 아닐까 싶은 지속적으로 수줍고 다정한 마음 말이다.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중의 무게가 동일하다는 점과 더불어.
젊은 날의 열정이 사라져도 연인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이는 결국 한 명이다.
스스로 선택한 이를 평생의 이성으로 여기며 수줍게 바라보는 것, 쉬울 리 없지만 불가능 할리도 없는 진짜 로맨틱함 아닐까?
@출처/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Anne of Green Gables, Lucy Maud Montgomery, 1908)
에오스클래식 10, 빨강머리 앤 (현대문학, 2011, 번역 김선형)
Anne of Green Gables ; Annotated (Nivant Publishing, 2015)
Anne of Green Gables Special Collect (Batman, 1983)
빨강 머리 앤 전집 (창조사, 1985, 번역 신지식, 일러스트 한인현·이우범)
빨강 머리 앤 전집 (동서문화사, 2002, 번역 김유경, 일러스트 전성보)
Anne with an E (CBC,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