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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May 30. 2017

빨강머리 앤, 사소한 이야기 1

빨강머리 앤 4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드라마를 원작처럼 사랑하기에는 취향의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하지만 소녀들의 미친 연기력과 집요한 고증만으로도 이 쇼는 충분히 볼 의미가 있다.

시리즈 1권 <Anne of Green Gables, 1908>는 일본과 한국 내 특화된 폭풍인기 덕에 수많은 판본이 있다. 무수한 1권 중 추천하고 싶은 국내 단행본은 <에오스클래식 빨강머리 앤, 2011>이다. 주석 달린 판본을 바탕으로 해선지 김선형 교수의 번역은 읽어 볼수록 무척 섬세하다. 건조하게 느껴지긴 해도 아동에 특화된 의역보다는 원전의 문학적 분위기를 충실히 구현했다. 그럼에도 술술 자연스럽게 읽힌다.

<100주년 공식 기념판 빨강머리 앤, 2016>의 번역도 나쁘지 않았지만 의역이 다소 강하게 느껴졌다. 취향 탓일지 모르겠지만 에오스클래식 쪽을 더 강력히 추천하고 싶다.

모두가 알고 있는 1권 한정해서 드라마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을 듯한 사소한 이야기들을 뽑아보았다.


(에오스 클래식과 Nivant사 Annotated 판본 표기를 따릅니다.)


#소녀들은 분홍색이 아니다 https://brunch.co.kr/@flatb201/163

#21세기의 빨강머리 소녀 https://brunch.co.kr/@flatb201/176

#앤과 길버트, 순정의 연대기 https://brunch.co.kr/@flatb201/177

#빨강머리 앤, 사소한 이야기 1 https://brunch.co.kr/@flatb201/178

#빨강머리 앤, 사소한 이야기 2 https://brunch.co.kr/@flatb201/179




레이첼 린드 부인은 몇 시간씩 부엌 창가에 앉아, 에이번리 주부들이 열여섯 장이나 떴다고 경외감에 찬 목소리로 말한 ‘코튼 워프’ 퀼트를 짜며..

코튼 워프 Cotton Warp는 인기 면사의 상표명이다. 보통 퀼트는 헝겊을 이어 붙이는 조각보 이불을 떠올리지만 린드 부인이 만들고 있는 것은 코바늘 뜨기 한 면사 조각보를 이어 붙인 침대 덮개이다. 19세기 후반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산업화 직전 무수한 자급자족은 여성에게 광범위한 노동을 요구했다. 이런 빠듯한 노동은 다양한 홈메이드 문화를 생성했다.

퀼트의 달인 린드 부인은 앤이 레드먼드에 진학하자 자신의 장기인 특별한 무늬가 들어간 이불을 만들어준다. 학내외에 명성 자자한 홈메이드 퀼트는 급기야는 옆집에 사는 부자가 팔라고 졸랐을 정도다. 앤이 결혼할 때도 린드 부인은 담뱃잎 무늬와 사과 잎 무늬의 퀼트 덮개 두 장을, 마릴라는 자투리 털실로 특별히 공들여 짠 깔개를 선물한다.

코딜리어 공주놀이 중인 앤. 코스튬으로 두르고 있는 것도 코튼 워프 퀼트로 보인다. 무척 아름답게 연출되었다.




그렇지만 그릇은 늘 쓰는 것들이었고 고작 꽃사과 프리저브와 케이크 한 종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손님은 아닌 게 분명했다.

집돌이 매슈가 제대로 갖춰 입고 외출에 나서자 동네 소식통 린드 부인은 재빨리 탐색에 나선다. 차려진 메뉴로 손님의 중요도를 추측하는 장면이다.

실제로 앤 시리즈에는 당대의 갖가지 풍습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여러 가지 저장식이 등장한다. 꽃사과 Crab-apple는 작고 시어서 딸기나 체리에 비해 일상식이기에 중요한 손님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들어서자마자 매의 눈으로 탐색하는 명탐정 린드 부인! 드라마에선 음식 대신 식기로 대체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돈 주고 일손 사는 게 얼마나 끔찍하게 힘들어졌는지 아시죠? 어리석고 자라다만 프랑스 남자애들밖에 구할 수 없다니까요..”

마릴라가 매슈의 사내아이 입양 계획에 관해 설명하는 장면이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의 ‘에드워드’는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인 켄트 공의 결혼 전 명칭이다. 영국 식민령이었기에 당시 국왕의 이름을 붙여진 것이다. 식민지 전쟁에서 패한 프랑스인 대부분은 그들이 토착 원주민을 쫓아냈을 때처럼 섬을 떠나야 했다. 남아있던 프랑스계 거주민은 이주마저 힘든 가난한 계층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이 작품에서도 쿠스버트 가의 일꾼 ‘제리 부트’나 배리 가의 임시 베이비시터 ‘메리 조’ 등 대부분의 프랑스계 인물들은 고용된 하급 노동자로 설정된다. 계급의식에 국가 감정이 더해진 인종차별은 당시의 시대적 편견을 드러낸다.

제이가 앤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 것은 불어가 더 익숙하기 때문.




“그래요, 빨간색이에요.” 소녀는 체념하듯 말했다.

“이제 제가 왜 완벽하게 행복할 수 없는지 아시겠지요? 빨간 머리를 하고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어요..”

미남미녀는 세계와 세대를 초월하지만 당시 서구권에서는 금발이나 새까만 머리가 미인의 조건이었다. 이는 종교적 영향도 큰데 예수를 배신한 유다나 동생을 죽인 카인이 빨간 머리로 묘사되며 부정적 인식이 퍼진 것이다. 지금에서야 근거 없음 취급받지만 꽤 오랜 기간 이런 생각이 팽배했다. 셜록 홈즈 시리즈 <빨간머리 연맹>처럼 불타는 붉은 머리들은 확실히 도드라진 존재로 소비되었다.

빅토리아 시기답게 정복 전쟁에 나선 영국은 식민지마다 대대적인 이주정책을 실시했다. 캐나다에 이주한 계층은 대다수가 차별받던 지역인 아일랜드, 스코틀랜드인이라고 한다. 실제 브리튼 연합에서 이 두 지역은 유독 신비한 전설과 강한 미신으로 이루어진 지역색을 드러낸다.

머리칼로만 보면 앤은 매슈와 마릴라에 비해 더더욱 진한 켈트 족의 피가 흐르는 셈이다. 앤이 유독 몽상에 강한 것은 유전자의 영향인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의 앤도 주연 배우가 아일랜드계 캐나다인이라고 한다. 소설 속의 앤은 스코틀랜드계이다.

‘Thrill’하게 하는 것이 뭐냐는 질문에 오이밭 흰 굼벵이들이라고 대답하는 매슈.. 네..알겠습니다




“부탁인데 코딜리어라고 불러주시겠어요?”

“그렇지만 앤이라고 부르시려면 철자에 e를 쓰는 앤으로 불러주세요.

“..이름은 다이애나야. ..글쎄다 내가 보기엔 어딘가 끔찍이 이단적인 데가 있는데..”

앤 시리즈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E를 붙인 이름에 관한 장면이다.

코딜리어는 동양권 사람에게조차 고풍스러운 우아함이 느껴지는 이름일 것이다. 많은 중세 문학 여주인공의 이름으로 쓰였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셰익스피어 비극 <리어 왕> 속 셋째 딸이다. 신중한 품행의 이 공주는 말수까지 적어 아버지의 오해를 사게 된다. 초면인 매슈에게 과장된 몸짓으로 엄청난 수다를 쏟아 붓는 앤의 이런 요청은 상반된 이미지로 웃음을 준다.

E자를 하나 더 붙인 Anne은 프랑스 식으로는 ‘앙느’로 어필되어 좀 더 고풍스러운 우아함을 풍긴다.

다이애나는 그리스 신화 속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영어식 표기이다. 그리스 건 로마 건 고루한 청도교 매슈에게 다신교 풍습이 마음에 들리 없다.

이름에 대한 앤의 집착과 소녀 취향은 자녀들 대에서 더욱 화려해진다. 비록 코딜리어, 그리젤다, 로잘린 드 비어 같은 중세인의 이름을 붙인 것은 아니지만 아는 지인들이 모두 자녀의 이름으로 거듭났다.





@출처/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Anne of Green Gables, Lucy Maud Montgomery, 1908)

에오스클래식 10, 빨강머리 앤 (현대문학, 2011, 번역 김선형)

Anne of Green Gables ; Annotated (Nivant Publishing, 2015)

Anne of Green Gables Special Collect (Batman, 1983)

빨강 머리 앤 전집 (창조사, 1985, 번역 신지식, 일러스트 한인현·이우범)

빨강 머리 앤 전집 (동서문화사, 2002, 번역 김유경, 일러스트 전성보)


Anne with an E (CBC,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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