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 / 줄리엣 할머니
드물게 완벽한 일요일 저녁이었다.
아스라한 파랑과 분홍빛으로 저무는 봄날, 달이 뜨자 무척 행복했다. 사연도 사념도 없었다. 그저 무심히 던져진 계절로 인한 행복이었다. 이런 종류의 행복은 미세하게 번져있는 우울로 완성된다.
Bittersweet이란 단어가 체화된 듯이 로맨스와도 썩 잘 어울리는 우울이다.
<바벨의 도서관>은 환상문학을 주제로 한 기획전집이다. 그 자체가 ‘판타지’이거나 ‘판타지의 특질에 포함된 작품들’로 선별되어 있다. 부연이 필요 없는 작가들의 작가, 보르헤스의 큐레이션은 끝도 시작도 없는 백일몽을 복기한다. 코스모폴리탄을 지향한 선별에도 보르헤스는 자국 작가들에 대한 평가에 아쉬워하는데 ‘루고네스’ 편이 대표적이다.
남미의 근대문화혁명 모데르니스모 Modernismo는 그 자신이 속한 자본주의에 반발하여 예술과 개인의 서정성을 중시했다. 주제에 있어 범세계적이고 이국적인 테마-이를테면 신화와 전설을, 표현에 있어 서정성이 극대화된 운율과 묘사를 선호했다. 이를 계기로 유럽보다 한 급 낮춰 평가되던 남미 문학들이 대거 세계화된다.
루고네스는 모데르니스모의 특질을 탁월하게 구사한 시인이자 작가였다. 즉흥적으로 보이는 문장마저 곱씹어 보면 치밀한 계산이 느껴진다. <바벨의 도서관> 수록분을 읽기 전 나는 이 작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보르헤스처럼 압도적인 작가가 극찬한 작품은 어쩔 수 없이 기대부터 앞서고 그만큼 빨리 실망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보르헤스 선별 한정, 만약 당신이 밑줄 긋기 좋아하는 문장 수집가라면 이 단편들에서 밑줄이 빠지는 부분은 조사 정도일 것이다. 스페인맹이라 원전 대비 충실도는 알 수 없지만 번역도 매끄럽게 읽힌다.
근대 과학시대의 영향이 담뿍 들어간 <이수르>와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 성경에서 모티베이션 한 <불비>, <소금 기둥>, 그리스 신화를 좋아한다면 제목에서부터 누구에 관한 이야기인지 눈치챌 수 있는 <압데라의 말> 등 작품마다 술술 읽히면서도 곱씹게 된다.
그러나 모데르니스모의 매력을 작정하고 구사한 작품은 역시 로맨스, <프란체스카>와 <줄리엣 할머니>이다.
루고네스는 ‘달빛’이라는 전통적인 메타포를 통해 관능과 애조가 뒤섞인 로맨스의 수사를 한껏 발휘한다.
단테의 신곡으로 유명한 ‘리미니의 프란체스카’는 그 비극성으로 인해 문학뿐 아니라 음악, 회화에서도 애용된 소재이다. 잘 알려졌지만 요약해보면 13세기 이탈리아의 세력가였던 폴렌타스 가와 말라테스타 가는 정략결혼을 추진한다. 소문난 미녀 프란체스카는 정략결혼에 반발했지만 정작 청혼을 위해 입성한 파올로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첫날밤이 지나고 새 신부 옆에 누워있는 이는 파올로가 아니다. 사실 말라테스타 가의 적장자는 흉폭한 곱사등이 지오반니였다. 어떻게든 이 혼인을 성사시키려 잘생긴 차남 파올로를 후계자로 속인 것이다.
자존심 때문에 결혼을 유지하지만 프란체스카의 삶은 수치와 절망뿐이다. 음모에 동참하긴 했어도 다정한 성품의 파올로는 죄책감을 품고 프란체스카와 가까워진다. 밀회를 거듭하던 둘은 의심 많은 지오반니에게 잔인하게 살해된다.
루고네스는 사건의 인과에 연연하기보다 감정의 밀도를 쌓는데 집중한다. 옛이야기처럼 시작되어 예정된 결말로 나아감에도 아슬아슬한 긴장에 움찔거리게 된다.
..남편이 처음으로 보낸 시선은 이미 그녀를 못 믿겠다는 모욕을 주고, 그녀의 숙명을 더욱더 잔인하게 만들어버렸다.
..조반니는 귀족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장점이 없는 사람이었고, 바로 그 점이 세인의 두려움을 유발하고 있었다. 귀족이라는 사실과 줄에 묶인 개 같은 의무감이 유발하는 두려움이 두 마리의 사냥개처럼 그의 명예를 지켜주고 있었다.
..조반니의 그런 사악한 짓은, 포도주가 시간과 어둠 속에서 익어가듯, 그렇게 십 년 동안 점증되었다.
..파올로는 시든 새싹을 기억하는 유일한 태양빛이었다.
단테와 달리 루고네스는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연심을 궁극의 플라토닉으로 설정했다. 때문에 이들은 육체적으로 더없이 순결하다. 그러나 순도 높은 결벽 앞에서도 둘의 눈빛만은 진실을 말한다. 그늘 아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은 한낮의 눈부심이 아닌 창백히 질린 달빛이다. 차마 입 밖에도 못 내고 핏방울로 흩어진 연정은 애틋함과 안타까움을 더한다.
..두 사람의 낯빛은 사색이 되어있었는데, 달빛은 그들의 창백한 얼굴을 영원히 그런 상태로 놔두어야 한다는 절망적인 신념을 가진 듯 더욱더 창백하게 만들었다. 눈에 고인 눈물이 살아있는 방울이 되어 -두 사람에게서 살아있는 유일한 것이- 두 사람의 손으로 뚝뚝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은 말도, 입맞춤도, 서로를 소유하는 것도, 그저 사랑을 확인하는 것일 뿐, 둘이서 함께 울었다는 행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줄리엣 할머니>는 무려 사십 년간 타 온 썸의 향방을 우아하고 유쾌하게 그린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도 불가항력의 감정에 사로잡혔지만 다가설 수 없다. 올리비아와 에밀리오는 스무 살 차이의 고모와 조카이기 때문이다. 비극이나마 사랑을 완결시킨 프란체스카와 달리 이 둘은 이기주의에 가까운 우울을 친족 간의 애정으로 가장한다. 이 커플은 소개부터 한껏 우아하고 장황하게 풍자된다. 다소 막장스러운 설정은 산뜻한 소네트의 분위기로 애틋함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그 슬픔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상류층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인 ‘고통의 이기주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고, 또한 자신들의 고독한 나날 밑바탕에 있는 권태의 지독한 위협보다 더 중요한 어떤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모와 그는 완벽할 정도로 단아하고 깨끗한 두 개의 대리석이었다. 내면적으로는 천진난만한 사람들이었는데, 그처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솔직함을 그동안 잘 유지해온 자존심으로 위장하고 있었다.
서로의 거짓말을 모른 척하는 긴장의 시간이 몇십 년 흘러 올리비아와 에밀리오는 노년에 접어들었다. 무심히 흘러가는 심상한 날들 속에 각자의 절박함은 플래시백으로 교차된다.
어느 봄날 저녁, 대기만큼 달콤한 달빛 탓인지 결국 둘에게도 선택의 순간이 온다.
..저 안, 저 아득한 암흑 속에서 얼음산들이 계속 무너지고 있었다.
먼저 용기 내어 이 미친 침묵을 헤치는 것은 아름다운 고모 올리비아이다. 그토록 오랜 시간 묶여 있던 에밀리오의 마음도 쇠락한 시간의 정원에서 방향을 정한다. 프란체스카에게 안타까운 환희를 목도하게 한 달빛은 이 커플에게 다른 종류의 안타까움을 던지고야 만다.
아주 약간의 소금은 달콤함을 극대화시킨다.
씁쓸함이나 우수가 내포된 로맨스일수록 물리지 않는 달콤함을 선사하는 것처럼.
과거의 어리석음은 대부분 흑역사로 이름을 바꾸곤 한다. 그러나 흘러가버린 절정을 복기시키는 것이 좌절의 떫은 뒷맛일 때도 있다. 해피엔딩과 관계없이 로맨스를 즐기게 되는 이유 아닐까?
@출처/
감상적인 달력, 레오폴도 루고네스 (Lunario Sentimental, 1909, Leopoldo Lugones)
바벨의 도서관, 보르헤스 해제 (La Biblioteca di Babele, 1941, Jorge Luis Borges)
바벨의 도서관 4, 레오폴도 루고네스 (바다출판사, 2010, 번역 조구호, 원전 편집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Jorge Luis Borges, 일러스트 툴리오 페리콜리 Tullio Pericoli)
프란체스카 (Francesca)
줄리엣 같은 할머니 (Abuela Julieta)
월하정인 月下情人, 신윤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