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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페에서 책 읽기 Jun 13. 2018

소녀 삼부작

작은 아씨들 / 빨강머리 앤 / 키다리 아저씨


연애나 여행을 글로 배우는 것이 어린 시절에는 웃길 일이 아니다.

감정의 행간을 깨우치는 데 있어 책은 상냥한 안내자다. 화려한 마법보다 멀지 않을 날의 나를 그려보곤 했다. 마치 가의 다혈질 소녀와 초록 지붕 집의 빨강머리 소녀, 그리고 수요일이면 우울해지는 소녀처럼.




작은 아씨들, 대기실의 숙녀들

아름답지만 허영심도 있는 ‘메그’, 재기 넘치지만 다혈질인 ‘조’, 상냥한 원칙주의자 ‘베스’, 귀엽지만 세속적인 ‘에이미’는 소녀다운 경쟁심과 이기심, 서투름과 순수함 속에 성장해간다.

무난한 작품을 써보라는 권유로 쓰게 된 <작은 아씨들>의 폭발적 인기에 올콧은 당황했다고 한다. <가면 뒤에서 Behind a Mask: or, a Woman's Power, 1866> 등에 비치듯 올콧은 좀 더 장르적인 문학적 야심을 품고 있었다. 급진적 여성주의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한 그녀는 결혼으로 귀결되는 여성의 삶에 냉소적이었다. 그 자신이 평생 가부장의 폐해에 시달린 이유도 있다.

이런 작가적 반발심은 <작은 아씨들>에도 살짝 드러나는데 독자들을 경악에 빠트린 로리와 조의 선택이 대표적이다. (뭐, 어린 마음에도 조가 로리에게 과분하다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딴 식으로 던져버리다니.. 휴우) 올콧은 자신의 페르소나 같은 조에게 독립적인 독신 작가의 삶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의 인기가 높아갈수록 독자들은 조와 로리의 로맨스가 완결되길 바랬다. 결국 병사한 베스 외에 세 자매는 모두 개성에 어울리는 상대와 결혼한다.

속편을 읽다 보면 그녀들의 소녀 시절은 결국 현숙한 마치 부인에 도달하기 위한 대기시간처럼 느껴진다.

우리를 사로잡은 그녀들의 본성, 생동감이 유쾌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미성숙하게 치부되는 그녀들의 소녀 시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의 행복한 후일담들은 매번 사족처럼 느껴지고 만다.

Little Women, 1915, 일러스트 Jessie Willcox Smith




빨강머리 앤, 소녀들은 분홍색이 아니다

철자 끝에 e 스펠링에 집착하는 엉뚱한 소녀, ‘앤 셜리’를 빼놓고 소녀들의 소녀를 이야기할 수 없다.

핸디캡이었던 빨강머리로 인해 앤은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닌 미녀가 된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카락보다 독특하던 개성은 시즌을 거듭하며 사그라든다. 작가적 재능은 자식들 이름에나 쏟아부으며 ‘e’의 존재 여부는 상관없는 블라이스 부인이 된다.

앤 자신-그리고 작가는 행복했을지 몰라도 갖은 미사여구를 뿌려대던 엉뚱한 말라깽이 소녀가 내내 아쉬워진다. 주구장창 써놓은 이전 글로 대신한다.

#소녀들은 분홍색이 아니다 https://brunch.co.kr/@flatb201/163

#21세기의 빨강머리 소녀 https://brunch.co.kr/@flatb201/176

#앤과 길버트, 순정의 연대기 https://brunch.co.kr/@flatb201/177

#빨강머리 앤, 사소한 이야기 1 https://brunch.co.kr/@flatb201/178

#빨강머리 앤, 사소한 이야기 2 https://brunch.co.kr/@flatb201/179

Anne of Green Gables, 1908




키다리 아저씨, 나의 창으로부터

‘제루샤’가 속한 존 그리어 고아원은 디킨스식 비참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디킨스와는 다른 형태로 못지않은 비참함을 준다. 고아원의 획일성은 원생들을 하나의 인격이 아닌 탈 없이 관리되다 방출할 명단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상상력만은 언제나 서슴없이 제루샤를 고아원 창 너머의 세계로 데려다준다. 체험해본 적 없는 현실 앞에 매번 무력한 몽상으로 흩어지고 말지만. 그러나 이 낙천적 몽상이 ‘주디’의 삶을 획득할 수 있는 기회도 준다. 주디의 몽상을 눈여겨본 키다리 아저씨는 그녀에게 체험을 선사한다.

허영에 휘청거려도 이해될 주디는 이 신세계에 취해있기보다는 열정적인 학습을 잊지 않는다. 범상할 정도로 당연하게 여겨온 풍경에도 한껏 열정과 찬사를 쏟아내는 주디의 수다를 듣다 보면 당연한 일상이 기적과 같을 수 있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그럼에도 주디의 ‘자기만의 방’은 버지니아 울프와 다르다. 앤처럼 고아이지만 현대판 마법사인 자본가의 전폭 지원이 있다. 조만큼 고집 세지만 편지라는 형식은 너그러운 자기변명이 되어준다. 주디의 거듭된 포장에도 애정으로 귀결되기 전 키다리 아저씨의 선의가 시혜적 자기만족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그래서 현대의 독자에게 이 작품의 진짜 반전은 키다리 아저씨의 실체가 아닌 주디의 선택이다. 

진짜 독립의 출발선에서 주디는 망설임 없이 상류층 유한부인의 삶을 선택한다. 괜찮다, 사랑하게 된 이가 마침 재벌이었을 뿐. 그러나 작품 전반에서 그토록 갈구했던 문학의 꿈은 참 편리하게 휘발된다. 속편에 묘사되는 주디의 행보는 자신은 기존의 상류층과는 다르다는 유유자적한 만족에 취한 것처럼도 느껴진다.

주디가 작가적 재능을 인정받은 시의 제목이 ‘나의 창으로부터’인 것은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암시가 되어버렸다. 아이스크림을 고대하던 우울한 수요일의 소녀는 이제 좀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알아버렸다.

물론 주인공이 항상 거창한 상징이 될 필요는 없다. 온전한 독립은 결혼의 유무와 무관하고 때로는 미성숙도 좋은 반면교사이다. 그러나 주디 자신이 스스로를 미성숙한 서사의 인물이라고 생각할 것 같진 않다는 점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Daddy-Long-Legs, 1913
Dear Enemy, 1915 웹스터는 두 작품의 일러스트를 모두 그렸는데 속편의 투박해보이는 일러스트가 훨씬 귀엽다




해피 엔딩

세 작품 속 그녀들의 삶은 어찌 되었건 결혼으로 귀결된다.

결혼이 인생의 무덤이란 썩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든 홀로든 삶은 저마다의 트로피와 고충을 지닌다. 이 소녀들에겐 사실 결혼보다 나은 대안이 희박하다. 그녀들이 적합한 배우자를 만난 마무리는 설레임을 떠나 안도하게 된다. 당시의 여성들에겐 결혼을 배제하고선 온전한 해피엔딩이 얻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질마저도 결혼의 그늘 아래 더 나은 존중을 획득했다. 결혼이란 선택지를 받기 전의 그녀들이 작가나 교사를 꿈꾼 것은 당대에 허용된 그나마 유일하게 다른 미래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가 지났지만 지금의 여성들과도 퍽 일치한다.


이 세 작품은 전집류에 의례 수록되지만 한결같이 사랑받는다. 언제 읽어도 너무 재미있다. 일상성에서 어떻게 이런 감칠맛을 뽑아내는지 음미하게 된다. 그러면서도 어린 시절에는 실체를 확실히 알 수 없던 불평등한 함의를 곱씹게 된다. 세 작가 모두 질문을 던졌지만 시대성에서 완벽히 벗어나진 못했다. 세 작가 모두 가부장제의 공고함에 시달리며 시들었다. 그럼에도 세 작가, 세 작품 모두 질문하길 멈추지 않았다. 각자의 방식으로 연대하길 바랬다.

생각해보면 왜 유독 여성작가들의 질문은 완벽해야 할까 싶다. 질문을 멈추지 않은 것, 심지어 너무도 쉽고 재미있는 목소리로 연대를 꿈꾼 것, 이 작품들이 고전으로 자리 잡은 이유일 것이다.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 https://brunch.co.kr/@flatb201/200





나의 조카는 여자아이들 특유의 인형놀이를 당연히 좋아한다. 자질구레하게 예쁜 온갖 것들, 발레와 피아노, 핑크색에 뿌듯해한다. 그런 조카에게 별생각 없이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진부한 질문을 던졌다.

“과학자!”

하루에도 수 천 번씩 장래희망이 바뀌고, 그것이 허용되는 나이에 지나가는 꿈 중 하나일 것이다.

질문만큼 진부한 장래희망임에도 무척 생경하게 들렸다. 어떤 직업 속 성별에 관해, 특히 연차가 높을수록 우리는 대충 그 결말을 알고 있다. 특별한 예지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누적된 경험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사적인 욕망에 적나라한 타입의 부모들이 혐오스러우면서도 욕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런 부모들의 투사에 동의하지 않지만 어렴풋하게 이해는 된다. 과학자이든 평범한 누군가이든 그녀의 삶을 항상 응원할 것이다.

무엇보다 떠밀리는 삶이 아닌 선택하는 삶이 가능하길 바란다.

그 자신의 일상이 은연중에 성별을 대표하기에 선택마다 죄책감을 품지 않아도 되길 바란다.

이기적으로 굴어도 타인을 밟는 게 아닌 낭창한 시대에서 살 수 있길 바란다.

때문에 과거의 여성이 될 나의 삶을, 오늘의 선택들을 종종 뒤돌아보곤 하는 것이다.





@출처/

작은 아씨들, 루이자 메이 올콧(Little Women, 1868, Louisa May Alcot)

작은 아씨들 1, 2 (펭귄클래식 코리아, 2011, 번역 유수아)


빨강머리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Anne of Green Gables, 1908, Lucy Maud Montgomery)

에오스클래식 10, 빨강머리 앤 (현대문학, 2011, 번역 김선형)


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Daddy-Long-Legs, 1912, Jean Webster)

키다리 아저씨 (더클래식, 2015, 번역 허윤정, 일러스트 진 웹스터 Jean Web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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