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영화 - 피아노

말을 할 필요가 없어, 피아노가 있으니까.

by 이영

안녕하세요? 이영입니다.

여름에 보기 좋은 영화들을 리뷰하고 소개합니다. 기본적으로 내용과 결말을 자연스럽게 누설하오니

원하지 않으시면 주의해주세요, 고맙습니다.

피아노(1993) 119분~120분, 19세, 왓챠

국내 재개봉 21/02/25

감독 제인 캠피온


줄거리

주인공 <에이다>는 여섯 살부터 말을 하지 않기로 선택한,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여성이다. 그는 아버지가 주선한 결혼을 하기 위해 딸인 <플로라>와 함께 뉴질랜드에 도착해서 <남편>과 <베인스>, 두 남자를 만난다. <베인스>에게서 피아노를 되찾기 위해, <에이다>는 위험한 내기를 하게 되는데...




피아노는 에이다의 무엇일까?

표면적으로는 목소리입니다.

피아노의 여정을 따라가 보면 에이다가 예상하지 못했는데도 함께 배를 탔고, 해변에 남겨졌다가 다시 에이다의 근처로 왔으며 내기에 이용되었고, 마지막에는 수장됩니다.

피아노는 에이다의 여섯 살 이후부터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이다는 마음의 목소리가 어린아이인데, 사실 지금의 에이다가 언제나 그쯤에 머물러있는 상태인 것입니다. 그러나 베인스를 만나면서 삶은 앞으로 나아갔고, 이제 에이다를 어린 시절에 머물게 했던 상징인 그 피아노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피아노는 에이다의 정신적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의미합니다.




극 중 무대극인 푸른 수염과 남편

아주 절묘하게도 모두가 아는 이야기인 푸른 수염이 극 중의 극으로 나옵니다. 당연히 푸른 수염은 남편이며, 에이다는 새로운 부인입니다. 초대된 뉴질랜드 주민 중의 한 사람이 극의 내용을 진짜로 착각하는 장면까지 완벽합니다.

극이 무대에 오르기 전 주변 인물들을 통해서 푸른 수염이 부인을 어떻게 공격하는지 나오는데요, 바로 손을 공격했습니다. 이 점이 원작 푸른 수염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며 영화의 흐름을 예고합니다.

제 생각에는 남편이 이 연극을 보았기에 에이다의 손가락을 자른 것이 아닌, 원래부터 그러한 성미였다고 느낍니다.

남편이 에이다에 대해서 쓴 편지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신도 목소리가 없는 피조물들을 사랑하셨다' 자신이 신이며 에이다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이 부분을 에이다는 남편될 사람이 인내심이 많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둘 사이의 관계, 시야의 차이를 나타내는 부분입니다.




에이다가 베인스를 선택한 이유

영화 내내 너무나 명확한 암시가 꾸준히 나왔습니다.

남편은 하지 않았고, 베인스는 했던 것이 있는데 바로 에이다의 의사를 존중하는 언행이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베인스가 제안했던 피아노를 걸고 하는 내기는 위험하고, 에이다라면 반드시 피아노를 얻기 위해 참가한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아노의 스토리에서는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고 실행했던 남편에 대비되어 베인스가 어느 정도 에이다를 자신과 동등한 상대로 여긴다는 점이 돋보입니다. 자신과 내기, 즉 사랑의 게임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피아노가 완벽히 조율되어있고, 베인스 자신은 레슨 받지 않고 들으면서 배우겠다고 했을 때 에이다도 이미 느꼈을 겁니다.


아래 세 가지 장면에서 정확히 살펴보겠습니다.


(1) 첫 만남에서

남편은 에이다를 만나기 전부터 에이다의 사진을 보며 그를 상상하고, 대뜸 키가 그렇게 작을 줄 몰랐다고 말하죠.
베인스는 에이다의 얼굴이 여행 때문에 피곤해 보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누가 어느 부분이 집중하고 있는지 드러납니다.
(2) 피아노를 대하는 모습에서

남편은 에이다가 피아노를 가장 갖고 가고 싶다고 했는데도, 혼수 짐에서 피아노만을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베인스는 피아노가 있는 해변으로 에이다와 플로라를 데려다주었고, 연주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며 해질 녘까지 그들과 어울립니다.
(3) 에이다의 의사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대해서

남편은 가족이라면 당연히 희생해야 한다면서 에이다의 피아노와 베인스의 땅을 마음대로 교환해버립니다.
베인스는 자신과의 내기를 지속하는 에이다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해 결국 피아노를 건네고,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이제 오지 말아 달라고 떠나겠다고 부탁을 합니다.


남편이 에이다를 통해 어떤 여성상을 본다면(한편으로 남편은 너무나 서툰 남자입니다. 어쩌면 아직 사랑을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에게 부인보다 중요한 건 얼마 안 되는 땅덩어리입니다.)

베인스는 에이다를 한 명의 개인, 눈앞에 있는 상대로 보고 있습니다.


당연히 에이다는 베인스를 선택합니다.


에이다가 아버지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결혼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기본적으로 말을 하지 않기에 쉽게 순종하는 성격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에이다의 피아노는 무엇보다 큰 소리를 내며 울립니다.

베인스를 좋아해야 해서 좋아했다기보다는 (그러한 부분도 없지는 않을 겁니다. 에이다가 도착한 남편의 집에 연애 상대라고는 많지 않으니까요.) 좋아할 만하니까 좋아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을 가집니다.

식탁을 피아노처럼 누르고 있는 에이다의 모습을 남편이 보았을 때 그의 반응은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었던 반면 베인스라면 어떤 반응을 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남겨진 조각들

플로라

에이다의 분신 같지만 아닙니다. 실제로는 에이다가 감추고 싶은 부분, 말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을 전부 솔직하게 폭로하는 마치 에이다 주위를 맴도는 요정이나 수호천사 같습니다.

변덕스럽고, 다정하거나 또 험담을 하기도 하죠. 자신에게 어머니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비밀을 갖자 불만을 갖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어린아이에게 어머니란 언제나 독차지하고 싶은 상대니까요.

남편이 에이다의 손가락을 자른 것에 대해서도 플로라처럼 어린아이의 잘못은 없습니다.




남편

이 사람이 어떻게 베인스도 듣지 못했던 에이다의 의지와 마음의 소리를 들었을까요?

정말로 푸른 수염처럼 에이다를 자신의 소유물로 여겼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베인스에게 에이다를 보내주겠다고 말할 때 그의 모습은 이전과 다릅니다. 만약 베인스가 없었고, 또 남편이 에이다를 하나의 개인으로 인식하는 일이 조금 더 빨랐다면... 하고 여러 가지 상상이 교차되며 안타까움을 남깁니다.

어쨌든 그는 에이다의 의지를 알고 나서는 그것을 들어주었습니다.





마치며

물을 통과한 햇빛처럼 부드러운 빛깔의 영화입니다. 야생의 자연인 숲, 늪, 바다가 나오지만 전부 무채색에 가깝고 이야기의 진행 역시 고요한 무드 입니다.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이 아직 시원함이 남아있는 여름의 이른 오전에 어울리는 영화입니다. 에이다의 선택과 행방에 흥미를 가지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모든 이미지는 한국판 공식 포스터, 스틸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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