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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Feb 09. 2022

공포의 나팔관 조영술

3대 트라우마

  병원에서 겪은 3대 트라우마가 있다. 트라우마는 전쟁이나 죽음의 공포를 겪은 사람들의 충격을 나타내기 위해 쓰이는 단어라 가벼이 사용하면 안 된다. 하지만 내게는 죽음의 공포처럼 너무나도 고통스러웠고, 계속 기억에 남고, 떠올리면 몸서리가 쳐지기에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첫 번째 기억은 6살 즈음 껌을 한 통 다 삼키는 바람에 관장을 했던 것. 


  치아가 좋지 않은 유전자를 물려준 게 미안하다며 엄마는 내게 과자를 일절 먹이지 않으셨다. 그러니 어른들이 껌을 씹는 것 만 보았지 뱉아야 하는 것을 알 길이 있나? 나는 옷장 안에서 엄마의 눈을 피해 후라보노 한 상자를 모두 삼켰다. (그 맛이 얼마나 시원하고 달콤하던지) 그리고 몇 시간 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엄마는 한달음에 나를 엎고 병원에 갔다. 뱃속에 들어가 딱딱하게 굳은 껌 덩어리는 엑스레이 사진을 하얗게 만들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사진이 까만색이 되어야 배가 아프지 않다고 하셨다. 그리고 배를 낫게 한다는 큰 주사를 항문에 넣었다. 나는 간호사 선생님이 참으라고 한 10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화장실에 달려가 뱃속의 폭풍을 느꼈다. 최대한 항문을 걸어 잠그려고 애를 썼지만 6세의 괄약근으론 어림도 없었다. 복통을 잃을 때까지 설사를 하고 모든 기운을 잃었다.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도 없어 축 늘어져 있던 기억이 난다.


  나는 덕분에 아무거나 먹지 않는 착한 어린이가 되었다. 망태할아버지 보다 무서웠던 관장의 공포를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몸에 좋은 음식이라면 눈을 질끈 감고서라도 꼭꼭 씹어먹는 그런 어린이 말이다.





  두 번째 기억은 무수면 위내시경. 


  대학시절 두 달만에 10kg가 갑자기 빠진 적이 있다. 이모가 걱정이 되어 종합건진을 신청해줬는데 내시경 할 때 수면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이다. 병원에 갔더니 카운터에서 수면/비수면을 선택하라고 했다.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 어떤 게 더 좋은 지 물었다. "비수면이 조금 더 불편해요. 대신 비수면을 선택하면 집에 빨리 갈 수 있고, 사만 육천 원 정도 추가 비용도 없으십니다." 불편함의 정도가 사람마다 천지 차이일 것 같았지만 의사 선생님께서는 전날 과음하고 토했을 때보다는 참을만하다는 위로에 걱정이 놓였다. 게다가 당시 통장엔 잔액이 오만 이천 원 밖에 없었기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왼쪽으로 누워 내시경을 넣을 수 있는 플라스틱을 입에 고정시켰다. 선생님께서는 움직이면 상처가 날 수 있으니 가만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잠시 후 입속으로 내시경 기계가 끝도 없이 들어갔다. 누군가 주먹을 쥐고 내 입속에 팔을 집어넣는 기분. 게다가 잘 보기 위해 주기적으로 위장으로 바람을 쏘는데 그때마다 구역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배를 꿀렁거렸다. 내가 구역질을 할 때마다 화면이 잘 보이지 않아 바람을 넣는 횟수가 늘어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면내시경으로 할 걸.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내시경이 끝나고 긴 기계가 몸 밖으로 나오며 식도를 훑는 느낌이 최악으로 끔찍했다. 두 동공은 초점을 잃어버렸고, 하루 종일 내시경 기계가 몸에서 뽑히는 멀미를 했다.





  세 번째 기억은 단연 나팔관 조영술이다. 


  시술 전 인터넷에서 공포의 나팔관 조영술 후기들을 백개쯤 읽었다. 어떤 사람은 진짜 죽을 만큼 아파서 아기 낳는 게 두렵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했다. 평소 아픔을 적게 느끼는 친구 K가 아무렇지도 않았다는 말을 믿고 가벼운 마음으로 방사선실에 들어갔다. 


  방사선실 한가운데에는 엑스레이 기계가 천장에 달린 스테인리스 침대가 있었다. 구석에 마련된 우중충한 꽃무늬 커튼을 걷으면 우스꽝스러운 치마가 준비되어 있다. 간호사님의 안내대로 옷을 갈아입고 조그마한 철제 계단을 올라 차가운 침대에 누웠다. 조용하고 낯선 방에 누워 스테이플러로 마감된 천장의 꼬불꼬불한 모양의 형상을 구경하고 있는데 주치의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거미처럼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소독을 하는데 안 그래도 차갑던 공기에 알코올이 승화되면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긴장 탓인지도 모르겠다. 소독이 끝난 후 "조금 불편하실 수 있는데 괜찮아요 " 하면서 서늘한 물체가 다리사이로 쑥 들어왔다. '헉'하고 놀라는 사이 "이제 자궁을 고정시킬 거예요 "안내와 함께 집게로 속살을 꼬집는 느낌이 두 번 연속으로 찌릿하게 전해졌다. 왜 밑을 집었는데 전두엽이 짜릿한 걸까. 너무 아파서 몸을 뒤척였더니 선생님은 차갑게 '이러시는 건 도움이 안 돼요.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라고 했다. 돌이킬 수도 없는 상황. 시간이 빨리 가만 바랐다. 잠시 후 "조금 뻐근하실 거예요"하며 조영제가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조영제는 자궁을 채우면서 왼쪽부터 오른쪽까지 그리고 아랫배 전체로 퍼졌다. 내 아랫배는 왼쪽에서 오른쪽까지 극강의 고통으로 채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아픈지 설명할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평소 겪던 생리통의 20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아파서 숨도 못 쉬고 '으아아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선생님께서는 소리 지르면 숨을 못 쉬고 아픈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하던 일을 계속하셨다. 영화에서나 보던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다. 5분에서 10분이면 끝난다던 시술은 마치 50분처럼 느껴졌다. 


  이제 다 끝났다는 말과 함께 조영제가 아래로 왈칵 쏟아져 내렸는데 고통은 함께 사라지지 않았다. 차갑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이리 저리로 나뒹굴었다. (사실 정신이 없어서 어쩌고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선생님은 나가시고 간호사님이 조용히 다가와 손을 잡아 주셨다. "많이 아프시죠?" 나는 대답 대신 눈물만 줄줄 흘렸다. 아픔이 진정될 때까지 누워 있다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설사 같은 복통이 찾아왔다. "간호사님, 저 지금 배가 너무 아픈데 화장실 가도 되나요?" 돌아온 답변은 "어지러울 수 있으니 안 된다"였다.  여기 "제가 여기 지금 실수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안 된다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휘감아 치는 뱃속의 돌풍을 다스리려 배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30분쯤 지나자 겨우 진정이 되어 비틀비틀 침대에서 걸어 내려왔다. 


  내가 누웠던 침대 머리맡에 휴지 세 뭉치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옷을 갈아입다 우연히 거울을 봤는데 산송장이 따로 없었다. 나팔관 조영술은 여성 혈액검사, 남성 정자검사와 함께 난임 검사의 기초 3종 세트다. 이 시술을 받고 자궁과 나팔관의 모양을 확인하지 않으면 난임 진단서도 나오지 않는다. 세상에 난임 환자가 얼마나 많은데, 이 고통을 다 견디는 걸까? 아니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출산에 비하면 나팔관 조영술은 새발의 피라던데, 내가 굳이 그 길을 가야 할 것인가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임신을 하는 게 맞는지 의구심이 자꾸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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