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나이 34세, 난소 나이 46세
지난 3월에 했던 난임 검사 결과를 애써 잊고 지내려 노력했다. 임신을 하면 버려야 할 것이 많으니까. 지금 생활에 매우 만족하며 살고 있으니까.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에 불안함은 불쑥불쑥 솟아났다. 직장에서 사람들이 애는 언제 가질 거냐고 물어볼 때는 더 그랬다. 그들의 입막음을 위해 발칙한 농담을 하기도 했다. "안 생기는 거면 어쩌려고 그렇게 물어보시나요. 자나 깨나 말조심 ^^" (눈치가 없는 사람들은 내게 진짜 안 생기는 건 지 피임을 하는 건 지 묻기도 했다. 망할.)
그즈음 친한 친구가 첫 번째 시험관을 실패하고 연락이 왔다. 시간도 노력도 쏟았기에 기대를 했는데 결과가 마음처럼 되지 않아 속상하다고. 그리고 친구는 나를 걱정했다. 혹시 제대로 검사받아본 적 있는지. 시험관을 해 볼 생각은 없는지. 글쎄. 고민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불안함은 호수와 같아서 돌멩이 하나만 던지면 된다고 했던가. 억지로 덮어 놓았던 불안감은 증폭되어 마그마처럼 끓기 시작했다. ENTJ가 마음을 추스르는 데는 계획이 중요하지! 걱정의 마감 기한을 정했다. '딱 여름휴가까지만 노는 거야'
드디어 9월이 왔다. 한 번 해봤으니 더 잘할 수 있으리란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겼다. 생리 이틀 차가 되어 경남에서 제일 유명한 난임 전문병원을 방문했다. 지난봄 방문했던 산부인과보다 시설은 낙후되었지만 뭔가 체계가 있는 느낌이다. 이 병원에는 대한민국만세를 탄생시켰다고 소문난 삼신할배도 있지만 초진은 접수조차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원하는 선생님이 있냐는 말에 '제일 덜 기다리는 선생님'으로 접수를 요청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든 선생님이 바쁘고 유명하셨다.) 상담실에서 난임 검사부터 시험관까지 순서를 설명 듣고 진료실로 올라갔다. 진료를 마치고는 임상병리실에서 검사를 위한 혈액을 채취하고 가라 하셨다.
펑퍼짐한 꽃분홍치마를 갈아입고 사마귀를 닮은 의자에 앉았다. 질초음파 과정과 캡처 사진을 모니터로 보며 하나하나 설명을 들었다. 난소의 크기가 조금 작은 편이지만 자궁 내벽이 깨끗하다. 자궁벽이 두껍고 딱딱한 편이라 선근증이 의심되는데 그동안 생리통이 엄청 심했으리라 생각된다고 했다.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진 않았지만 생리통으로 쓰러져 병원에 간 적도 있었다. 그동안 생리통으로 찾은 병원에선 원인을 못 찾았었는데 신통방통했다. 의학적으로 피임 없이 1년 이상 임신이 되지 않으면 난임으로 본다고 한다. 일단 병원의 도움으로 자연 임신을 시도해 본 적이 없으니 2달 정도는 진행해보자고 권하셨다. 자연 임신 시도 과정을 확인하면 시험관을 선택하더라도 도움이 될 것이라 하셨다. 주사보다 부작용이 적은 경구투여 배란유도제를 처방받았다. 앞으로 5일 간 일정한 시간에 먹어주면 난자가 잘 자랄 것이라고 했다.
주치의 선생님께선 따뜻한 스타일은 아니시지만 자신의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있어 보였다. 위로하는 말이나 표정은 사용하지 않으셨다. 대신 나의 상황과 선택 가능한 옵션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해주셨다.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하지만 선생님께서 별 일 아닌 것처럼 말씀하시니 나도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평소 일할 때 착한 사람보다 일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나는 선생님에게 신뢰가 갔다.
며칠 뒤 검사 결과를 듣고 난포가 자라는 양상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영양상태 불량(빈혈, 비타민D 부족, 엽산 부족 등)을 판정받아 비타민D 주사 및 보조 영양제가 처방될 것이라고 했다. 영양상태는 조금만 노력하면 관리할 수 있다고 했다. 문제는 AMH 수치였다.
AMH(항뮬러관호르몬)은 여성의 난소 기능과 생식능력을 판단할 수 있는 검사다. AMH는 난자의 주머니인 난포에서 분비되는데, 태어날 때 원시난포 형태로 약 2백만 개 정도 가지고 태어나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수가 줄어든다. 따라서, AMH의 수치가 높은 것은 난소에서 배란될 난포가 많다는 것이고, 낮다는 것은 배란될 난포가 없다는 것으로 폐경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낭성 난소증후군의 경우 연령대보다 AMH가 높게 측정된다.)
AMH 수치는 20대는 4.0~5.0ng/ml, 35세 전후로는 3.0ng/ml 정도 되며, 나이가 들어 폐경에 가까워질수록 0ng/ml에 가까워진다. 일반적으로 0.5~1ng/ml은 폐경 이행기, 0.5ng/ml 이하는 폐경으로 본다. - 네이버 지식백과 건강 용어사전
나의 AMH 수치는 0.72ng/ml. 난소 나이로 치면 46세라는 거다. 그동안 건강검진을 할 때면 항상 신체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젊게 나오고, 평소에도 동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난소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띠동갑이나 많다니. 머리를 망치로 세게 맞은 듯 충격이 컸다. 생각해보니 지난 3월에 검사를 받았을 때에는 42살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그럼 6개월 만에 이렇게 난소의 기능이 떨어졌다는 말인가. 너무 늦었나 생각이 들다가도 지금이라도 늦기 않게 병원을 다시 찾길 잘했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그동안 임신을 원치 않았음에도 임신되지 않던 것이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나니 속이 상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