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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Sep 12. 2022

내 나이가 어때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활을 할 때였나. 그게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즈음 할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삐쳐 있으셨다. 하루는 평소와 같이 노란색 장판 위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는데, 평소와 다르게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점심에는 고봉으로 담은 밥도 반도 안 드셨다. 이상했다. 삼촌과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있어서 그런 거라 하셨다. 마을에서도 온화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우리 할아버지의 토라진 모습을 보게 되다니. 그 모습이 어린아이 같아서 자꾸만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길 수 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왜 저래?"

"몰라, 느그 할아부지 한테 물어봐라."


"삼촌, 할아버지 무슨 일 있나?"

"에휴... 니가 할아버지랑 이야기를 좀 해보는 게 좋겠는데..."


 뭐지. 나만 모르는 건가? 아무도 이야기를 해주지 않자 나는 텔레비전 소리가 크게 들리고 있던 방의 문지방을 넘었다. 가지런한 나무 문살이 움직이며 삐그덕 소리를 냈다.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물었고 긴 침묵이 이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어서 알려 달라고 할아버지에게 매달리고 보챘을 텐데 그날은 왠지 할아버지의 시간을 기다려줘야 할 것 같았다. 길고 긴 침묵 끝에 할아버지는 리모컨의 빨간 전원 버튼을 꾹 누르고 텔레비전에서 눈을 뗐다. 얼마간의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할아버지는 마치 고자질을 하는 아이처럼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었던 할아버지는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초등학교 교육과정을 밟지 못했다.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 공부시키느라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부터 요즘 유행하는 노래 가사 중에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가사가 있다는 말까지. 이런 이야기를 왜 갑자기 하냐 싶었지만 어렵게 말문을 연 할아버지의 입을 막고 싶지 않아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마침내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말은 두 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운전면허를 따고 싶은데, 느그 삼촌들이 다 반대한다 아이가. 느그 할머니도 다 한편이라."

"할아버지가 공부한다는데 자식들이 무슨 상관이고. 고마 해삐면 되지."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고 날까 못 하그로 한다이가. 갱운기 타고 댕기는건 암 말도 안 하면서. 차가 갱운기보다 훨씬 안전한데"

"으이그. 삼촌들은  사달라고 할까  그런  아이가? 내가 차는  사줘도 운전면허 필기 문제집은 사줄게!! 할아버지 응원한다이가. 그리고 우리 할아버지 진짜 멋있다."








 할아버지의 머리맡에는 항상 문제집이 놓여있었다. 문제집을 펼쳐 보았더니 얼마나 많이 보았는지 까만 볼펜 똥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고, 안 그래도 얇은 종잇장이 더욱 얇게 파스락거렸다.


"우와. 할아버지 공부 진짜 많이 했네? 바로 붙을 거 같다."

"아이다. 엊그제 하동 가서 시험 쳤는데 떨어져뿌써."

"시험을 벌써 칬다고? 이리 열심히 했는데 왜 떨어졌노? 우리 할아버지 똑똑한 거 내가 잘 아는데."

"내용이야 다 아는 내용이지. 그런데 나(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글자 읽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서 문제를 끝까지 못 풀어보고 고마 떨지 삔 거라."

"맞나. 그러면 문제 빨리 읽는 연습을 해야 되나? 그거는 시간 오래 걸릴 긴데?"

"시험 치는데 가서 항의를 했다이가. 다 아는 내용인데 글자를 빨리 못 읽어서 떨어졌다고. 무신 방법이 없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몸이 불편한 새럼(사람)들이 응시하는 그런 게 있다는기라. 시간도 1.5배 더 주고, 문제도 읽어준다 하대. 그래서 다음 시험은 그걸로 접수해놓고 왔다."







 할아버지는 2번의 필기시험과 1번의 실기시험을 치르고 운전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그 해 할아버지의 나이는 78세였는데, 하동군에서는 최고령의 나이에 운전면허에 합격했다며 관련자들이 너도 나도 축하인사를 건네었다고 한다. 삼촌들은 십시일반 돈을 모아 작은 중고차를 구입해드렸다. 할아버지가 자동차 금액보다 더 큰돈을 보태라며 삼촌들에게 주시긴 했지만. 그렇게 할아버지의 도전을 반대하던 할머니는 이제 경운기는 불편해서 못 탄다며 소녀처럼 웃으셨고, 운전을 하는 내내 할아버지는 할머니보다 더 많이 웃으셨다. 할아버지의 애창곡과 함께.


"야야야, 내 나이가 어때서. 운전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 할아버지는 2년 간 열심히 낡은 은색 자동차를 몰고 다니셨다. 가끔 내가 시골에 가면 버스터미널까지 태워다 주시기도 하곤 했는데, 중앙선 침범으로 접촉사고를 낸 이후 바로 차를 파셨다. 접촉사고 피해자였던 택시기사양반이 합의금으로 입이 쩍 벌어질 만큼의 액수를 요구했고, 할아버지는 자식들 걱정시킬까 봐 말도 하지 못하고 혼자 해결하셨다고 한다. 자동차와 이별한 뒤 2박 3일을 식음을 전폐하시며 끙끙 앓던 할아버지는 돌연 네발 오토바이(A.K.A. ATV)를 구입하셨고, 다시 신나게 전통시장과 마을을 누비고 계신다. 다음 달이면 92번째 생일을 맞으실 할아버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운전을 할 수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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