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역국이 뭐길래

by 연근

평소에 연락이 없던 친적 어르신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생일이라매? 미역국도 못 먹고 어떡하니? 엄마가 살아 계시면 미역국이라도 끓여줄 긴데. 아이다. 이제 니도 어른인데 그런 거 하나쯤은 할 수 있어야지."




2006년 12월 30일

엄마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생일


윤이 나는 노란 꼬까옷을 입고 하얀 버선을 신고 차갑게 누워 있던 엄마를 기억한다.

덜컹거리던 봉고차 안에서 점점 미지근해지던, 이내 식어가던 엄마의 손을 생각한다.

눈을 감고 플루이드 아래 쌕쌕 아가처럼 소리를 내며 누워있던 엄마의 숨소리를 떠올린다.


뭐가 그리 급해서 수능도 안 친 나를 두고 떠나 버린 걸까. 언젠가 보았던 영화에서 처럼 모든 게 꿈이기를 바랐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동안 힘들었지? 사실 이건 너를 향한 쇼야.' 해주길 바랐다. 미역국이 뭐라고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사람 마음을 찢어지게 만드는 건지. 푸른 밤이 까만 밤이 되고, 다시 창밖이 환해질 때까지 나는 목 놓아 울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딩동-' 초인종이 울렸다. 이상하다. 오늘은 토요일인데.




수능이 끝나고 누리게 된 방학이었다. K와 S는 월화수목 금요일 아침이면 매일 같이 우리 집에 등교를 했다. 우리는 막 고3 수험생활을 끝내고 강남고등학교(우리 집이 강남동이어서)에 진학한 4학년이라는 거다. 학생이 학교에 빠지면 안 된다는 핑계와 함께 그들은 부지런히 우리 집 문지방을 드나들었다.


집에 오자마자 그들이 하는 일은 가슴팍에 원숭이가 그려진 티셔츠로 갈아입는 것이었다. 교복이라고 했다. 그들은 내가 찾아주지 않아도 우스꽝스러운 티셔츠를 챙겨 입고 집으로 돌아갈 때면 늘 같은 자리에 벗어 놓았다. 강남고 4학년 학생의 덕목은 공부보다는 끝내주는 수다를 떠는 것이었다. K가 아르바이트하면서 겪은 일, S의 마음에 들어온 연하남의 이야기를 꼭꼭 씹으며 시간이 되면 점심을 먹었다. 부른 배를 두드리며 침대 위에 시체처럼 널부러 져서는 재방송 드라마를 봤다. 겨울의 해가 석자쯤 기울어지면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들의 루틴이었다.


점심으로는 주로 교회에서 가져다준 반찬을 함께 먹었다. 가끔은 초밥집을 하던 S네 가게에서 가져온 깻잎장아찌와 김을 반찬으로 먹었다. 아주 가끔은 특식으로 십시일반 용돈을 모아 싸구려 피자나 치킨을 시켜먹었다. (콜라 시킬 돈이 부족해서 냉장고에 구석에 있던 일주일 지난 김 빠진 콜라를 마시거나 그마저도 없을 땐 보리차를 마셨다.) 붕어빵이 먹고 싶은 날에는 돼지저금통을 털었는데 동전이 부족해 삼십 원을 줍겠다고 하루 종일 동네를 걸어 다닌 적도 있었다.




'딩동-'


다시 초인종이 울렸다. 고개를 들어 달력을 봤다. 오늘은 분명 토요일이다. 아무도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그것도 아침부터.


"누구세요?"

"...."

"딩동-"

"누구세요?"

"....."


누군가 잘 못 눌렀겠지 싶어 방으로 돌아가려는데 누군가 문을 세차게 두드렸다. 이중 잠금장치를 확인하고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S가 "야! 문 열어라! 생일 축하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문을 활짝 열어 재치 곤 집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와.. 밖에 굉장히 춥다" 곧바로 K도 들어왔다. 상황 파악이 안 된 나는 고장난 인형처럼 멀뚱멀뚱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야 뭐하는데? 빨리 들어 오너라 밥 식는다"

"어?"

"내 태어나서 미역국 처음 끓여봤다. 엄마 아빠 생신 때도 안 해봤는데 이런 불효녀가 어디 있니. 아빠가 딸 키워놔 봐야 아무 소용없다고 혀끝을 차더라.ㅋㅋㅋㅋㅋ"


S는 미역국이 들어 있던 양은냄비와 가쓰오부시 간장에 절인 깻잎장아찌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주머니에선 은색 빛의 동그란 물체가 나왔다.


"그건 또 뭔데?"

"뭐긴 뭐야. 공깃밥이지. ㅋㅋㅋㅋㅋ 가게에서 몰래 가까웠다. 점심시간 되기 전에 나중에 다시 몰래 갖다 놔야 한다. 엄마가 밥그릇 세면서 담아 놓거든"

"야, 나는 토요일인데 S가 갑자기 강남고 앞으로 오라길래 뭔 소린가 했잖아. 나는 빈손으로 와서 미안. 대신 오늘 시키는 거 다 해 줄게. 왕놀이 한번 하든가.ㅋㅋㅋㅋㅋ"


깔깔거리고 있는 친구들이 점점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눈물이 똑똑 떨어졌다. 손에는 숟가락이 쥐어졌다.


"야. 빨리 먹어라. 엄청 공들여서 간 맞췄는데 눈물 들어가면 짜서 못 먹는다. 그리고 흉하다.ㅋㅋㅋㅋㅋ"


울다가 웃다가 울다가 웃다가 미역국을 먹었다.

내가 다시 시무룩해지면 K는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털 난다며 간지럼을 태웠다.




얼마나 끓였는지 미끄덩해진 미역과 밥알을 꼭꼭 씹으며 '미역국이 뭐길래 이렇게 사람을 울리나'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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