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씩식이 May 23. 2017

식사는 하셨나요?

서른둘, 셰프 김지희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 조용한 공간에 탁탁탁 칼질하는 소리가 울린다. 오늘의 메뉴는 태국 고추를 더해 칼칼하게 끓인 오뎅나베와 오렌지 생즙을 넉넉하게 짜 넣은 블루문 맥주 한 잔.


김지희는 늘 함께 있는 사람의 끼니를 걱정해주는 사람이다. 별거 아니라는 듯이 뚝딱뚝딱 잘도 만들어 한 숟갈 떠서 어느샌가 입 앞에 가 져다 준다. 미역국 백반, 단호박 카레, 우렁 알리오 올리오, 산더덕 밥, 대게 파스타, 하몽 샐러드. 메뉴도 참 다양하다. <마스터 셰프 코리아 시즌4>에 출연하면서 할머니 손맛의 아가씨, 한식 셰프로 많이 알려졌지만 그녀의 요리에 경계는 없다. 어떤 일이든 하나로 규정짓고 획일화하는 것을 기피하는 그녀의 면모가 그녀의 음식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요리하는 여자 김지희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자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 예술가이며, 플로리스트, 영어강사, 번역가, 그리고 동시 통역가이다. 온전히 스스로의 선택으로 이처럼 다양한 일을 업으로 삼고, 하루를 분 단위로 쪼개어 살아가고 있는 그녀가 궁금하다. 방금 직접 끓여낸 오뎅나베를 한 사발씩 퍼다가 촬영팀에게 나누어주는 그녀를 붙잡아 앉히고, 두서없는 질문들을 늘어놓았다. 물론, 블루문 한 잔을 앞에 두고.

김지희는 어렸을 때부터 왜 굳이 직업은 하나여야 하는지에 의문이 들었다. 한 가지를 30년 넘게 하는 건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에게 가장 어려운 질문은 ‘자기소개’가 되었다. 한 가지 단어로 규정하기 힘든 사람. 어쩌면 처음부터 그녀가 아닌 다른 무엇으로 그녀를 정의하는 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을 하는 누군가가 아닌 그냥 김지희 그녀 자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녀가 하는 많은 일들 중에 가장 생소하게 느껴진 미디어 아트와 퍼포먼스에 대해 먼저 물어보았다. 대학에서 미디어 아트와 퍼포먼스를 전공한 그녀는 미술 전문 잡지인 <월간 미술>에서 선정한 신인작가에 이름을 올리고 정식으로 작가 데뷔를  하게 되었다. 우리에게 다소 생소할 수 있는 미디어아트와 퍼포먼스라는 예술 분야가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물었더니, ‘작가마다 그 방식이 너무 달라서 하나로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그래도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미디어라는 재료로 예술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상당히 ‘김지희스러운’ 분야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그 경계가 무한한 분야.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10년 넘게 시애틀에서 살다가 갑자기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게 되었고, 한국 대학의 수강신청 과정이 익숙지 않아 등 떠밀리듯 이 분야를 전공으로 삼게 되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인간의 삶에는 정말로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담: 각자의 사정, 김지희의 선택.


쏠이  예술가가 무언가에서 영감을 받아 특정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이 궁금하다.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질문하자면, 예술에도 디자인처럼 ‘intangible’에서 ‘tangible’로 가는 논리 또는 과정이라는 게 있는가.


김지희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관심이 있는 특정 주제를 기본으로 여러 권의 책을 본다. 책을 보다가 이거다 싶은 것이 생기면 그걸 기본으로 해서 어떻게 풀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전에 작품을 준비하다가 사람 사이의 관계가 너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격 자체도 주변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기도 하고, 인간의 삶이라는 것이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수많은 타인들과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을 시작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책을 통해 단서를 찾고 있었는데, <커넥션>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관계’는 인간관계뿐만 아니라 종교나 인종 등 그 범주가 굉장히 생각보다 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방대한 ‘관계’ 요소들 중에, 한 인간에게 가장 친밀하고 가까우며 예민한 요소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그러다가 ‘완전히 낯선 사람과의 스킨십’이라는 주제로 이어지게 된 거다. 근데 무턱대고 길 가는 행인을 아무나 붙잡고 스킨십을 할 수가 없으니, 연극적인 요소를 더하기로 하고 남자 배우들을 섭외했다. 배우 공고 사이트에 작품 설명을 올렸더니 6백 명 정도의 프로필이 왔고, 그중에 마음에 드는 여덟 명과 연락을 취해서 함께 작품을 찍었다. 한 명에 한 시간씩 여덟 시간 동안 처음 보는 남자들과 키스를 한 거다.


김지희. (2015). Audition. [Captured Picture].


쏠이  갑자기 굉장히 흥미가 생긴다. 미디어 아트, 퍼포먼스를 전공으로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었나.


김지희  어릴 적부터 미술에 관심에 많았기 때문에 전공을 택했다.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미대를 갔고, 어쩌다 보니 미디어 아트와 퍼포먼스를 접했는데, 재미있어서 계속하게 되었다. 원래는 유화 전공이었는데, 수강신청을 안 해서 마지막에 자리가 남은 전공에 들어가게 된 거다. 미국에서 10년간 살다가 갑자기 한국에 들어오게 돼서 대학을 다시 들어갔는데, 2학년 올라갈 때 전공을 정해야 하는데 수강신청 시스템을 몰라서 가만히 있다가 조교가 나에게 미디어아트, 퍼포먼스 전공이라고 알려줬다. 그래서 학교 다니는 내내 적응을 잘 못했다. 에세이로 전공 과제를 모두 대체하다가, 졸업 작품으로 앞서 말한 스킨십 프로젝트를 하게 되었고, 거기서 터진 것이다. 시리즈로 총 3개의 작품을 했는데, 이걸로 졸업도 하고 <월간 미술> 작가 데뷔도 하게 되었다.


김지희. (2015). Audition. [Captured Picture].


쏠이  월급쟁이 직장인의 시선에서 보면 질투 나는 라이프 스타일이다.


김지희  좋은 대학을 나와서 말만 하면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에서 일하는 친구들이 나에게 부럽다고 한다. 회사 다니기 싫고, 나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불쌍하다. 나 역시 그들 만큼 일을 많이 하고, 경제적인 부분에서 하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들과 나의 차이라면, 나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지금 하는 일은 모두 내가 좋아해서 시작한 일들이고, 지금도 이 일들을 하는 것이 좋다. 뭐든지 재미있게, 긍정적으로 하다 보면 결과도 좋은 것 같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겠다고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딱히 해줄 말은 없다. 내 삶은 그냥 온전히 나의 선택이다. 그들이 사는 삶은 그들의 선택인 거고.


쏠이  마셰코에는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


김지희  당시에는 한창 영어수업을 많이 할 때여서 거의 하루 종일 수업 스케줄이 잡혀 있었을 때라 학생들을 정말 많이 만났다. 수업은 주로 집에서 하는데, 누구든 오면 항상 첫 질문이 “밥 먹었니?”였다. 먹었다고 대답하면 수업을 시작하고, 안 먹었다고 하면 일단 밥부터 해서 먹이고 수업에 들어갔다. 점심 먹고 간식까지 챙겨 먹고 가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의 끼니도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음식을 해서 누군가를 먹이는 일 자체가 너무 재밌다. 워낙 많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메뉴를 해주다 보니, 당시 가르치던 학생 중 한 명이 마셰코에 나가보라고 권유해서 참가 신청을 하게 되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출연도 하게 되고, 좋은 성적도 얻고, 취미로만 하던 요리가 직업이 된 계기가 되었으니 나름 내 삶에 큰 영향을 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


디자이너들이 디자인을 하는 과정을 죽 늘여놓고 보면 국적과 분야를 막론하고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그래프를 그린다. 물론 그 정도나 세부적인 면에서 차이는 있겠지만, 문제의 발견과 정의를 거쳐 해결책을 발전하고 이해 가능한 언어로 표현하는 일단의 과정에는 대부분 맞아떨어진다. 그래프의 모양을 본떠 ‘더블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이 이론이 디자인 분야에 시사하는 바는 매우 많지만, 그중에서도 디자이너의 직관성과 논리에 연관 지어 생각해보았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이 디자이너들 중에서도 스스로의 직관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다. 타고난 미적 감각과 소위 말하는 ‘보는 눈’이 달라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어떤 창의적 과정을 통해서 디자인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고 믿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더블 다이아몬드 이론과, 재즈 피아니스트의 애드리브와, 나의 졸업 논문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을 바탕으로, 그건 다 개 풀 뜯어먹는 소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당신의 직관은 당신의 논리에 기반한다. 인간 뇌 활동의 5%에 해당하는 ‘의식’은 나머지 95%의 ‘무의식’에 이끌리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오랜만에 입은 바지 주머니 속에서 오천 원짜리 지폐를 발견한 것처럼 갑작스럽고도 매우 기쁜 결정을 내렸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이 살아온 시간 동안 읽어온 책들과, 만난 사람들과, 찾은 장소와, 들은 음악들과, 맛본 음식들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을 말하자면 당신은 김지희를 판단할 자격이 없다. 어떤 일을 하던지 꼭 지키려고 하는 것 한 가지를 묻자, 그녀는 효율성이라고 대답했다. 들인 시간과 노력만큼의 결과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영어 수업도, 요리하는 것도, 작품 활동하는 것에서도 효율적인 방법과 각각의 상황에서 가장 빠른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이다. 작가가 작업을 효율적으로 한다는 말에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김지희는 일단 시작을 하는 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탁상공론만 펼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효율성만큼이나 즉흥성도 김지희에게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녀가 아무 생각 없이 내린 결정에 미간을 좁히고 혀끝을 차고 있다면, 어느 문장이든 단번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긴 시간 동안 읽어온 그녀의 책들에게 사과를 해야 한다. 또한 그녀가 대책 없이 저지른 일들에 마음의 잣대를 드리우고 있다면,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만 보았을 뿐 수면 아래 감춰진 치열한 물질은 보지 못한 것이다. 그 모든 상상과 판단과 이야기들을 뒤로하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김지희는 함께 있는 사람을 박장대소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때로는 눈물 나게 맛있는 음식으로, 때로는 짓궂은 장난으로, 때로는 스스로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의 끼니를 걱정해 주는 사람. 김지희에게 인터뷰를 요청하며 신사동의 스튜디오를 찾았을 때, 그녀가 내가 건넨 첫인사.


“식사하셨어요?”



2017년 5월 23일 화요일.


글_황은솔

사진_이현재

협조_플레이버 www.flavr.co.kr


김지희_ @jihee_janine


매거진의 이전글 은밀하게 위대하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