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OCOMFY Feb 02. 2023

아버지와 당근



아버지가 당근거래를 하고 오셨다. 평소 중고 제품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으시던 분이셨던지라 아버지의 당근 후기는 꽤 신선한 이야기였다.


“아니… 마침 사용 중이던 이어폰이 고장 났잖아. 근데 또 마침! 내가 눈여겨보던 무선 이어폰이 정말 좋은 가격에 매물로 나왔더라고. 그래서 한 번 보기나 하려고 거래 약속을 잡았지 뭐.”


허허하라는 머쓱한 웃음과 함께 아버지는 당신의 첫 번째 당근 거래를 무용담처럼 늘어놓으셨다. 이른 저녁을 드시고 혼자 나가시기 무서우셨던 아버지는 어머니께 같이 가달라고 했고, 그렇게 두 분은 떨리는 마음 부여잡고 약속 장소로 향하셨다.


약속 장소인 지하철역 2번 출구 앞에는 막 대학생이 된 듯한 앳된 청년이 서 있었는데, 아버지가 ‘당근…?’이라고 묻자 소스라치게 놀랐다고 했다. 최신형 무선 이어폰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흰머리 듬성듬성 자란 노년의 인물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면서 말이다.


물건을 받아 상태를 살펴보는 아버지를, 앳된 청년이 또 이리저리 살펴보는 모습을, 어머니가 먼발치에서 지켜봤다는 얘기는 상상만으로도 웃겼다. 자신의 예상보다 물건 상태가 좋은 것에 만족한 아버지가 계산하려고 하자 청년은 선뜻 먼저 만 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할아버지가 구매하러 오셨네요.’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평소였으면 자신은 여전히 팔팔하다며 이두박근을 한껏 부풀렸을 아버지시지만, 그날은 어이쿠 고맙다면서 할아버지라는 호칭과 만원 할인을 기꺼이 교환하셨다고 했다.


당신의 첫 당근 거래 후기를 낄낄거리며 말씀하시는 아버지 모습이 보기 좋으면서도 참 낯설다고 느껴졌다.

어릴 때는 그렇게 무섭던 분이셨는데... 아버지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이미지는 한 가지였다. 구겨진 미간에 회초리를 들고 있는 모습. 언제라도 나를 혼낼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 그런 아버지였는데, 지금은 내 앞에서 천진난만하게 이어폰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일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자식이 나이가 들수록 오히려 부모님은 점점 어려지신다는 얘기가 생각났다. 그러니까 내 삼십 대가 와장창 꺾이고 있을 때, 아버지 인생은 막 두 번째 사춘기를 보내고 계신 것은 아닐까?


 날 거래의 교훈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나에게 날아든 세월의 화살은 동시에 부모님께도 날아갔다는 것이다. 익숙함에 속아 아버지 나이를 잊고 살았다.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벌써 할아버지, 할머니로 보이신다 생각하니 늦기 전에 함께 보내는 시간을 더 자주 가져야겠다 싶었다.

두 번째 교훈은 더욱 실용적인 것인데, 다음번 당근 거래할 때는 무조건 아버지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할아버지 호칭 한 번에 만원이면 꽤 수지타산 맞는 장사가 아닌가? 아버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셨는지 최근에는 부쩍 자주 당근 어플을 보시는 눈치다. 이러다 매너 온도 100도 찍는 것 아닌가 모르겠다.

작가의 이전글 반만 잘 가는 남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