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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와칼 May 20. 2020

아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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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경쟁 스포츠가 그렇듯 펜싱 역시 심리적인 면이 중요한 종목입니다. 상대에게 심리적으로 위축되면 생각이 많아지고 동작은 부자연스러워집니다. 오늘 제가 그랬습니다.


상대는 클럽의 코치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고 실업팀에서도 선수 생활을 했습니다. 국가대표를 하기도 했고요. 그렇다면 저는 어떤 선수일까요?


스물한 살에 철학과로 입학한 대학교에서 처음 펜싱을 접했습니다. 동아리 활동이었죠. 운동에 소질이 없던 터라 동호인 대회에 나가면 예선 전패로 꼴찌 하기를 반복했고요, 재능 있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한 달이면 배우는 걸 몇 달에 걸쳐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펜싱이 재미있어 계속 했습니다. 줄넘기 몇 개를 끊어 먹고, 학교를 휴학하고 새벽에도 펜싱 연습을 한 끝에, 마침내 동호인 대회 1등을 하게 됩니다. 꼴찌에서 1등까지. 그 다음 제가 한 일은?


엘리트 대회. 이른바 선수 대회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시작은 다시 예선 전패 꼴찌. 하지만 어쩌겠어요, 재미있는 걸. 다시 또 계속 했고요, 작년에는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예선 통과를 하기로 했습니다.


서설이 길었군요. 아무튼, 오늘은 제가 훈련하고 있는 클럽의 코치님과 게임을 뛰었습니다. 결과는 10대 8 패배. 스코어만 보면 근소한 차이군요. 하지만 내용은 전혀 아니올시다 입니다. 게임 내내 쫓기는 펜싱을 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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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도 그랬지만 실업팀 정도 레벨의 선수들과 하면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심판이 프레-알레(준비-시작)를 외치고 앞으로 나가면, 상대를 밀 수가 없는 거예요. 상대를 밀지 못하고 수비적으로 게임에 임하게 됩니다. 그러다 제가 공격할 차례가 되면 제 몸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요. 그리고 생각이 많아집니다. 손을 이렇게 해야 하나? 이 방향으로 칼을 돌려야 하나? 자연스럽게 리듬은 깨지고 기술은 정확하게 수행되지 못합니다.


문제는 뭘까요? 제가 적어놨군요. '생각이 많아진다.' 일찍이 제 스승께서는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생각하면 생각에 쫓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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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소리야. 생각하면 생각에 쫓긴다니. 그럼 생각하지 말라는 건가? 잠시 돌아가 봅시다. 저는 무언가를 분류하고 분석하는 데 능한 편입니다. 사고의 방향이 그렇습니다. 시를 읽을 때도 시가 짜여진 내적 논리를 파악하고 시인의 시작법을 분석합니다. 펜싱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펜싱에서 득점이 일어나는 상황은 몇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각 상황에 맞는 타이밍과 기술이 있고요. 저는 이러한 내용을 끊임없이 정리하여 자신만의 체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상대적으로 보았을 때, 대다수의 펜싱인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펜싱은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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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시간 제한이 없는 사회 탐구 모의고사를 본다고 생각합시다. 우리는 사회 탐구 과목의 지식을 암기하고, 때로 이해합니다. 자, 이제 우리는 충분한 지식을 쌓았습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다 풀 수가 있을 정도로요.


시험이 시작 됩니다. 점수는 몇 점일까요? 당연히 100점입니다. '어떤 문제가 나와도 다 풀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을 쌓았고, 시간은 무제한이니까요. 


그럼 조건을 몇 개 더해봅시다. 문제는 100문제. 시험 시간은 단 10분입니다. 1분에 10문제를 풀어야겠군요. 그리고 모의고사가 아니라 수능이라고 합시다. 사회 탐구 영역 보다 앞서 본 과목은 썩 잘 보지 못한 상황. 꼭 만점을 받아야 합니다. 


결과는 어떨까요? 똑같은 문제를 풀었어도 점수가 달라졌을 겁니다. 물론 어마어마한 노력과 심리적 문제를 극복 했다면 동일하게 100점을 맞았겠죠. 네, 펜싱 선수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겁니다. 어마어마한 노력과 심리적 문제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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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펜싱의 여러 가지 상황을 나누고 각 상황에 맞춰 훈련을 해왔습니다. 그럼 훈련한 내용을 실제 게임에서 쓸 수 있을까요? 네, 쓸 수 있습니다. 상대가 초등학생 선수라면요. 그리고 중학생 선수여도 할 수 있습니다. 고등학생이라면? 가능합니다. 대학생이라면? 좀 어렵지만, 상대에 따라 다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자, 그럼 상대가 실업팀 레벨 이상이라고 생각합시다. 상상하니 몸이 살짝 굳네요. 이게 제가 가지고 있는 심리적 장벽입니다.


앞으로 돌아가서. 펜싱 선수는 아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언제 할 수 있어야 할까요? 바로 자신이 원하는 바로 그 순간의 피스트 위에서. 자신이 싸우고 싶은 그 대회 속에서, 그런 조건 속에서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아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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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싱 게임 속에서 상황은 순간 순간 변합니다. 특히 상대의 레벨이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높다면 그 변화는 더욱 빠르게 팽팽하겠죠. 그 상황을 생각하고 쫓아가면 늦게 됩니다. 몸은 뒤늦게 반응하고 타이밍은 이미 지나가 있지요. 그래서 '생각하면 생각에 쫓긴다'고 합니다.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재에 집중하고 그때 그때 반응하고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쯤에서 다시 제 스승의 말씀을 꺼내야겠군요. 운전을 잘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스승님 왈,'빠르게 운전하는 사람도 아니고 커브를 잘 도는 사람도 아니다. 위기 상황에 잘 대처하는 사람이다.'


하물며 펜싱 경기는 고속 스포츠카 두대가 서로 마주보고 으르렁 대다 갖다 박으려는 상황과 같습니다. 그런 상황을 머리로 생각하고 대처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지요. 현재에 집중하고 대응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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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역설적으로 이론과 체계화의 중요성이 있습니다. 반응은 그냥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철저하게 학습해야만 몸이 알아서 반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펜싱 레슨은 특정 상황을 상정하고 그에 맞는 타이밍과 기술, 거리, 속도를 연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연습이 몸에 새겨지면 게임 속에서 그 상황이 왔을 때 생각없이 반응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제 제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요? 저같은 유형의 사람은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펜싱을 할 때 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도요. 이런 사람에게는 분리가 필요합니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따로 마련한다. 게임을 뛸 때는 자신을 믿고 현재에 집중할 것. 즉, 나를 냅두기. 그렇게 하면 게임을 뛰다 몰입에 들어갈 수도 있겠군요. 당분간 그렇게 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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