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오늘도 나의 감정 다이얼을 돌리듯,볼륨을 살짝 높여본다.

by 구름 위 기록자

외갓집에 가면 늘 같은 풍경이 있었다.
정오가 가까워지면 할아버지는 라디오 앞에 앉으셨고,
나는 그 옆에서 졸린 눈을 비비며 라디오 알람 소리를 들었다.
‘띠리리, 띠리리’ 정오의 시보음은 마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처럼
우리 모두의 리듬이 되었다.
그 시간의 햇살은 유난히 노곤했고,
할아버지 곁에서 느꼈던 평온함은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다.


중학생이 된 나는 라디오를 켜두고 숙제를 했다.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별이 빛나는 밤에를 들으며 사춘기를 보냈다.
하루하루 마음이 복잡하게 흔들리던 그 시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누군가의 사연과

DJ의 다정한 목소리는
어쩐지 나에게도 말을 걸어주는 것 같았다.


사춘기가 가장 짙었던 어느 여름,
나는 새벽 3시에 남궁연의 라디오를 들었다.
그 시간의 공기, 잔잔히 깔리는 음악, 꿈꾸듯 흘러가던 이야기들.
가장 깊은 꿈을 꾸듯 잠이 들던 그 새벽이
내게는 지금도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감성의 시간이다.

그때 라디오에서 처음 들었던 곡들, 처음 알게 된 아티스트들은
지금도 내 아이폰 플레이리스트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어쩌면 그 음악이 좋아서라기보다,
그 음악을 듣던 그때의 나가 좋아서일지도 모르겠다.


그 시절 나는 새벽 4시까지 라디오를 듣고
피곤한 눈으로 학교에 가야 했지만,
그래도 그 시간만큼은 내 마음을 누구보다 다정하게 안아주는
친구가 곁에 있는 듯했다.


라디오는 계절을 먼저 알려주는 감각이었다.
여름밤, 창문을 열면 들려오는 여름 특집 방송은
계절의 시작을 알렸고,
겨울에는 캐롤과 함께 따뜻한 감성이 먼저 도착했다.
사람들의 웃음과 눈물, 사연과 노래.
라디오 속 그 작은 우주는 내 감정을 조율해 주는
다이얼 같았다.


주말 오후, 엄마와 거실에 앉아 클래식 FM을 들었던 시간도 좋았다.
가사 없는 음악 사이로 나누던 이야기들,
그 평온함이 우리 모녀 사이의 온도를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 시간엔 말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라디오를 듣는 걸 너무 좋아해서
몇 번은 사연도 보내봤다.
처음 내 이름이 불리고, 사연이 소개되었을 때의

그 짜릿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기쁨은 나를 공개 방송으로 이끌었고,
초대받아 간 라디오 공개홀에서 DJ를 눈앞에서 본 순간,
나는 라디오라는 세계에 더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라디오는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쁘게 변하고,
손끝으로 무언가를 넘기는 시대지만
나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는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고 싶다.
조용히, 다정하게, 늘 그랬던 것처럼.


오래도록 좋아했던 책 <국화꽃향기>의 주인공이
라디오 PD였다는 사실은 그 시절 내게

큰 설렘으로 남아 있다.
음악을 알고, 감정을 다루며,
한 편의 방송을 조용히 아름답게 완성해 내는 사람.
지금도 내게 가장 부러운 직업이 있다면,
아마도 그런 라디오 PD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라디오는 내 곁에서 조용히 흐르고 있다.
배경음이 되어주고, 글감이 되어주며
나의 시간을 함께 만들어간다.

오늘도 라디오는, 나와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라디오와 함께한 시간은 나를 이루고,
오늘도 나는 그 흐름 속에 조용히 묻혀 있다.
나의 감정 다이얼을 돌리듯,
볼륨을 살짝 높여본다.

오늘, 당신을 이루고 있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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