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나는 베토벤의 음악을 자주 듣지 않는다.
너무 유명해 어디서나 들려오는 탓에 귀가 피로하기도 하고,
그의 곡을 늘 장중하고 묵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피아노 협주곡 5번, 일명 ‘황제’만은 내 플레이리스트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이 곡을 들은 건 피아니스트 조성진 덕분이었다.
그의 연주로 접한 ‘황제’는 단숨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물론 그의 건반이 완벽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곡 자체가 밝고 희망을 연주하는 듯한 기운을 품고 있었다.
웅장함으로 시작하는 1악장
첫 악장은 협주곡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당당하게 문을 연다. 오케스트라와 피아노가 기술적으로 엮이며 황제라는 제목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면 - 웅장하고 풍성하다. 연주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2악장으로 스며든다.
부드럽고 깊은 울림, 2악장
두 번째 악장은 베토벤이 남긴 가장 심오하고 감동적인 음악 중 하나로 꼽힌다. 차분하고 온화한 선율이 1악장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특히 피아노와 관현악이 섞이는 중간 파트에서는 늘 소름이 돋는다. 이 부드러움 덕분에 1악장과 이어질 3악장이 더욱 드라마틱하게 빛나는 듯하다.
생동감의 피날레, 3악장
베토벤은 2악장에서 3악장으로 넘어가며 주제를 미리 살짝 드러내는 독창적 연결을 시도했다.
그 덕분에 3악장은 마치 말이 천천히 발돋움하다가 박차고 달리는 듯 경쾌하게 펼쳐진다.
그러나 단순한 웅장함에 머물지 않고 끝까지 생동감과 활력을 유지하며,
전쟁과 청력 상실이라는 현실 속에서 탄생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만큼 밝고 힘차다.
이 협주곡을 완성하기까지 그는 전쟁 속에서 경제적 궁핍과 청력 악화를 감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를 서포트한 루돌프 대공에게 바칠 이 작품을 끝까지 써 내려갔다.
‘황제’라는 이름은 후세가 붙였지만,
어려운 시대에 희망과 영웅적 서사를 담아낸 이 곡에 그보다 더 어울리는 칭호가 있을까.
대부분의 교향곡을 끝까지 듣다 보면 비슷비슷한 악장에 지루함이 스미곤 한다.
하지만 ‘황제’는 다르다. 1악장이 없다면 2악장이 빛날 수 없고, 2악장이 없다면 3악장의 환희도 없다. 세 악장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를 이루며 서로를 비춘다.
전쟁통에 글 한 줄 쓰기도 벅찼을 나였다면,
아마 “살려주세요” 다섯 글자밖에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믿음과 열정으로 세 악장을 완성했고,
그 곡은 오늘도 나를 숙연하게 만든다.
‘황제’라는 이름이 과연 이 곡에 어울리는가를 두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다.
정말 이 음악이 황제라는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하지만 베토벤이 이 곡을 써 내려가던 순간을 떠올려 본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한 편의 장대한 작품을 완성해 낸 그 여정을 생각한다면
‘황제’라는 타이틀은 결코 과분하지 않다. 오히려 그 찬란한 노력과 열정에 딱 맞는 이름이다.
일요일 오후, 베토벤의 ‘황제’를 들어보시길.
개인적으로는 조성진과 정명훈이 함께한 무대를 가장 좋아한다.
https://youtu.be/12kG3NjjrWY?si=Y5sAQr1fYZeOZ28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