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결이 바람될 때]

When breath becomes

by 지안



0. 계기

대학교 방학때 친구가 추천해줘서 구매했던 책인데 책장에 꽂아두기만 했다.

책장을 둘러보다가 인생의 시작과 끝에 가장 가깝게 서있는 '의사가 전하는 삶과 죽음'이라는 주제가 궁금해서 집어 들었다.


1. 총평

오랜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던 책이다.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환하게 웃고있는 폴과 루시, 그리고 딸 케이디의 사진을 보며 가슴 한편이 먹먹했다.


36세의 젊은 나이의 의사이자 환자로서 죽음과 가까워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녹여낸 책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시작과 끝을 지켜본 의사가 본인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보인 태도, 삶이란 어떤 의미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해온 그만이 할 수 있는 선택, 마지막까지도 죽음에 맞서는 그의 용기를 보여주었다. 특히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I can't go on)"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나는 계속 나아갈 거야(I'll go on)"라고 스스로 답변하며, 죽는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한 그의 말이 이 책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개인적으로는 의학에 대한 폴의 관점을 보며, 인간적인 의사가 되는 길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수많은 죽음을 직면할 의사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스스로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삶의 의미와 죽음, 그 안에서 우리가 취해야할 태도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길 때 진한 여운이 남을 것이라 생각된다.



2. 인간적인 의사와 죽음


(1) 의학에 대한 폴의 관점


"하지만 이 길은, 책에는 나오지 않는 답을 찾고 전혀 다른 종류의 숭고함을 발견하며, 고통받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육체의 쇠락과 죽음 앞에서도 인간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진지한 생물학적 철학을 추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의학을 실천하는 것이다."


무엇이 인간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지에 대해 고민했던 폴이 의학을 선택한 이유가 위의 문구에 담겨 있다. 그는 삶의 처음과 끝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자 했고, 그 안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 듯하다.


(2) 환자를 대하는 태도


"이 얼마나 중대한 판단인가"
"앞으로 실제적인 의학을 더 많이 배워야겠지만, 생사가 걸린 상황에서 지식만으로 충분할까? 물론 지능만으로는 충분치 않고 도덕적 명확성 또한 필요했다."
"하지만 내게 맡겨진 역할, 즉 겸자를 든 무덤 파는 사람으로서 죽음의 시간과 방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일을 충실히 해내야 한다."


의사란 정말 쉽지 않은 직업이다.

하루에도 수십번 수백번씩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의사는 단순히 의학적 지식에 따른 논리만으로 환자의 질병과 치료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다. 폴이 말하는 '도덕적 명확성' 뿐 아니라 환자의 상황과 삶에 대한 가치관을 이해하고 이에 맞는 최적의 결론에 도달해야 한다. 겉보기에는 같은 치료방향이, 누군가에게는 최선이 선택이 되고, 또다른 누군가에게는 최악의 선택이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환자가 치명적인 두부 출혈로 병원에 들어올 때, 신경외과의와 나누는 첫 대화는 환자의 가족이 죽음을 기억하는 방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재앙(Disaster)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부서지는 별을 의미하는데, 신경외과의의 진단을 들었을 때 환자의 눈빛이 바로 그렇다"


의사의 한 마디로 환자는 천국과 지옥을 오가기도 한다.

때문에 의사의 말은 무게가 필요하고, 본인이 하는 말의 무게를 알고 신중히 내뱉을 필요가 있다. 의사의 따뜻한 희망의 말이 환자와 보호자에게 행복이 되기도 하지만, 헛된 희망의 불씨가 되기도 한다. 위의 구절과 같이 의사는 환자나 가족이 죽음이나 질병을 잘 이해하도록 도우면서도 조심스럽게 상황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3) 인간적인 의사


"나는 톨스토이가 묘사한 정형화된 이미지의 의사, 무의미한 형식주의에 사로잡혀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로 변해가고 있는게 아닐까 두려웠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인간적인 의미를 완전히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두려웠다."


어떤 일이던 우리는 모든 일에 익숙해진다. 의사에게 진료와 수술도 마찬가지이다. 긴장과 걱정으로 시작한 일은, 손에 익숙해지면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도 습관적으로 완벽한 절차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일이 몸에 익는다는 것은 빠르게 정확하게 일을 수행할 수 있고, 노련해진다는 말이다.

'초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라는 말이 많은 일을 함에 있어 강조된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초심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본인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감정과 마음가짐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다면,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초심을 떠올리고 잊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기계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가 아닌 인간적인 의미로서의 의학을 행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말이다.


"의사는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다가 때로는 그 무게를 못이겨 스스로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의사의 책무는 무엇이 환자의 삶을 가치있게 만드는지 파악하고, 가능하다면 그것을 지켜주려 애쓰되 불가능하다면 평화로운 죽음을 허용해주는 것이다. 그런 책무를 감당하려면 철두철미한 책임감과 함께 죄책감과 비난을 견디는 힘도 필요하다."


폴은 뇌를 수술하기 전에 환자의 가치관과 정체성을 이해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노력에 반하는 불가피한 실패로 인한 큰 죄책감은 그를 무너지게 만든다. 의사는 환자를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살펴야 하지만, 동시에 좌절하지 않아야 한다. 환자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고도, 그렇다고 외면해서도 안된다.

'내 수명을 줄여서 남의 수명을 늘려주는 직업'이라는 말은 희생이라는 명목하에 인간으로서 의사를 무너지게 만들수도 있겠다. 그의 상황을 이해하려 노력하면서도 한편으로 스스로를 살피며 책임감과 부담감에 짓눌리지 않도록 해야한다. 인간적인 의사가 되기란 참 힘든 일이다.


(4) 의사와 죽음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공간에서 일생을 보낸다면 연민을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스스로의 존재도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생사의 순간에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너무 가까이 있으면 그 순간의 본질을 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태양을 직접 응시하며 천문학을 배우겠다는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 나는 결정적 순간에 환자들과 함께하지 못하고 그저 그 순간에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많은 고통을 목격했고, 더 나쁘게도 그런 고통에 익숙해졌다."


의사인 친구 S와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실습 중 담당하게 된 환자분이 있었다.

교수님을 쫓아다니며 아침 회진 때 인사를 드리고, 목요일과 금요일 중간중간 환자분의 컨디션을 확인하고 문진을 하러 간 것이 다였다. 일요일 오후, 케이스 발표를 준비해야 했기에 별 생각없이 병원 EMR에 접속했다. 환자분의 성함과 등록번호를 입력하자 [퇴원]이라는 단어가 의무기록 가장 위에 작성되어 있었고, [사유 : 사망] 이라는 문구를 보자마자 가슴이 쿵 내려 앉았다. 간호기록에 남겨져 있던 [OO원 주머니에서 발견되어 장례비용으로 사용함] 이라는 문구를 보니 눈물이 났다.


사실, 여러 과를 돌다보면 담당 환자분과 자주 만나고 대화하는 과정에서 라뽀(*Rapport, 환자 의사 사이의 신뢰도) 가 쌓이기도 하고, 친근한 사이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환자분은 달랐다. 내가 환자분과 나눈 말이라곤 대화라고 하기도 뭣한 것이,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에 대한 대답으로 들은 "으으,,,," 라는 신음소리였다. 내가 기억하는 환자분의 마지막 모습은 교수님께서 손을 꼭 잡아주시며 한 "많이 힘드시죠, 진통제 조금 더 투여해드릴께요, 불편하신 점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라는 말에 "으으,,,"라는 대답뿐이었다.


이렇게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던 분임에도, 내가 그분의 의무기록을 여러번 들여다봤다는 것만으로도, 회진때 담당환자라 더 유심히 봤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죽음은 더 크게 다가왔다.


처음 마주한 죽음이었기 때문인지 충격이 꽤나 컸던 나는, 친구 S에게 문자했다. "오늘 이런 일이 있었는데, 마음이 정말 좋지 않더라. 너는 환자의 죽음을 마주할 때 어떻게 대처해?? 너무 힘들거나 그렇진 않아?"

"나도 처음엔 많이 울었어. 여전히 죽음이라는 것에 무심해지진 않지만, 무던해지긴 하는 것 같아. 이젠 모든 죽음에 눈물이 나진 않더라고." 라는 답변을 주었던 S.


무심하진 않지만, 무던해진다는 그 말이 참 슬펐다. 의사라는 직업은 그런 직업이구나. 죽음에 너무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매번 모든 죽음에 온 힘을 다해 슬퍼할 수 없다. 슬퍼하다가도 익숙해지게 되는구나. 한 명의 의사에게 환자는 여럿이고, 한 명의 환자의 죽음에 슬퍼하다가 다른 많은 환자들을 뒤로 할 수는 없으니, 잠시만 슬퍼하고 다시 다른 환자들의 곁에 돌아가야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참 슬프다.



3. 인상깊은 구절


"그때부터 나는 환자를 서류처럼 대할 것이 아니라 모든 서류를 환자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폴이 수많은 죽음과 마주하며 죽음에 무던해질 즈음 결심한 내용이었다.

많은 환자를 보며 나 또한 죽음에 너무 익숙해지지 않게, 이 문구를 떠올리며 일하고 싶다. 물론 한동안은 기계처럼 일하면서 바쁜 일상에 치이겠지만, 문득, 아주 가끔이라도 이를 떠올리며 내가 가진 직업의 의미와 태도를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걸로 인간적인 의사가 되는 길에 한발짝 다가선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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