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종교와 개인의 삶
여기서 "성경"은 종교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내면의 자기자신과 만날 수 있게 해주고 외로운 인간에게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주는 역할을 한다. 많은 성경 구절들이 나오고 등장인물들은 끊임없이 신을 찾지만 이 책이 그렇게 기독교적으로 다가온다던가, 아니면 특별히 사이비처럼 다가온다던가 하지 않는다. 절대. 네버. 오히려 상당히 역사적이고 또 자아성찰적이다.
한 군인은 생각없이 군부에 충성하며 살다가 부인의 죽음을 계기로 삶의 태도를 바꾼다. 변절자가 된 그는 쫓기듯 수도원으로 들어가 감금 아닌 감금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찾아온 군인들은 한 사람을 위한 영원한 안식처에 몇십명의 수도자들을 밀어넣어 생매장했다. 나중에 살아있던 이 군인은 이 형제들의 시신을 한 방에 한 구씩 매장하고 또 그 방의 벽 전면을 성경 구절들로 채우게 된다.
또 다른 등장인물인 후는 사촌인 연희누나를 아꼈다. 연희 누나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한 군인에게 데려가진다. 그 군인에게 돈을 받은 후의 아버지가 누나를 그에게 데려가준다. 그녀는 몸을 허락한 뒤 비참하게 버려졌고, 이에 분노한 후는 군인을 찾아가 칼을 휘두른다. 후와 후의 아버지는 도망쳐서, 어린 후를 산속의 수도원에 맡긴다. 후는 거기서 지내며 점차 수도원 생활에 익숙해져가며 그날의 사건과 산 아래의 삶을 거의 다 잊어간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수도원에서 사람들이 찾아들고, 후는 그곳을 나가야만 했다. 그 후, 후는 누나를 찾아 전국을 누빈다. 죄책감과 욕망이 뒤섞인채 자신은 그 군인이 되어 누나를 범했다가 , 또 그 군인에게 돈을 받고 누나를 군인에게 데려다준 아버지의 가면을 쓰고 누나를 범하는 망상에 시달린다. 연희 누나도, 후도 모두가 힘겨워한다. 다 괜찮아졌다고 생각했을 때, 괜찮아진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후는 포기하고 길에 쓰러졌고, 한 노인을 만나게 된다. 그 노인은 길을 계속 걸어보라 충고한다. 후는 길을 걷다가 자신이 가야할 곳은 그 수도원이라 생각하고 산 속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길에서 만난 그 노인은 사실 예전에 수도원에 함께 있던, 군부에 등을 돌렸던 그 군인이었다. 둘은 함께 벽서를 쓰며 이미 죽은 형제들의 편안한 안식을 돕는다. 후는 결국 그 노인의 시신까지 수습한 뒤 본인을 위해 마련된 본인의 영원한 안식의 방에서 스스로를 매장한다.
[다시 읽고 싶은 구절]
p.27 초월자에 대한 믿음과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는 둘 모두 근본적이고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라는 것. 사람은 숭배하면서 동시에 즐길 수 있다는 것. 숭배를 위해 즐기고 즐기기 위해 숭배할 수 있다는 것. 켈스의 책과 천산의 벽서를 탄생시킨 것은 믿음만도 아니고 아름다움만도 아니라는 것.
가장 처음에 나오는 구절이라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다 읽고 나면 이 말이 결국은 하고 싶었다보다는 생각이 든다.
p.49 닮은꼴을 발견한 사람에게 발견되는 그것은 모양이나 색의 근사가 아니다. 그를 사로잡은, 구체적으로 실체가 느껴지지만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그 실체를 부정할 수는 없는, 그 사람 주변의 어떤 기운의 근사이다. 그 기운은 상대에게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상대에게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더러 자기에서 나온 것을 상대에게서 나온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를 감싸는 것은 언제나 설명할 수 없고,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그런 기운이다. 그 기운의 유사가 모양이나 색깔의 같음이나 다름에 우선한다. 아니, 그것들을 초월해서, 모양과 색깔의 같음이나 다름과 상관없이 기시감을 불러낸다. -중략-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속고 있을지언정 상대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떼어놓고 보니 대단히 사랑에 관한 글 같다. 사랑을 포함한 인간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이해.
p. 77 그는 칼을 휘둘렀지만 칼을 휘두름으로써 벌어질 일에 대해 숙고하지 않았다. 숙고했더라면 칼을 휘두르지 않았을 것라는 뜻이 아니라 거기까지 생각을 밀고 가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뜻이다. 충동적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어쩌면 칼을 휘두르기 위해, 휘두를 자격을 얻기 위해 숙고하지 않는 편을 택했다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 A라서 B했다가 아니라, B하기 위해 A였다고 착각? 생각? 인식? 했다.
p. 92 대부분의 꿈이 그러하듯 후가 꾼 꿈의 마지막 부분은 꿈 바깥, 현실의 간섭에 의해 변형되었다. 급작스러운 느낌이 들 정도로 이야기가 굴절된 것은 꿈꾸는 사람인 후의 외부 환경이 급작스럽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 이런 통찰력 정말. 대단하다! 나도 늘 어렴풋이 생각하다 까먹다 하던걸 이렇게 딱 꼬집어서 글로 표현하다니!
p. 107 사랑의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이 비합리적인 것처럼 사랑의 열정에서 빠져나오는 것도 비합리적이다. -중략- 그리고 그것이 이런 사랑이 무책임하고 폭력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을 정당화할 때 행사된 폭력이 사랑에서 빠져나왔으므로 이제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자리에서 다시 행사된다. 사랑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할 수 있었으므로 ("사랑한다. 그러니까 나와 자자.") 이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 앞에서 사라져라.") 그리하여 사랑을 이유로 무슨 일이든 하는 것과 사랑의 부재를 이유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구별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무슨 일이든 하는 것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이든 하지 않을 수 있다.
-> 사랑을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하려 할 때는 이것이 폭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항상 하려고 한다. 이 책은 인간의 행동, 그 원인, 인과관계 등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숙고가 동반된 하나의 인문학 서적같은 소설인 듯 하다.
p.196 그것은 그가 죄수가 아니라 수도사로 살았기 때문이었다. 보낸 사람은 감옥으로 보냈지만 그는 수도원에서 살았다. 보낸 사람은 수도원을 감옥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그는 감옥을 수도원으로 만들었다. 죄수로 살면 수도원도 감옥이 되고 수도사로 살면 감옥도 수도원이 되는 이치를 그는 몸으로 증명했다.
-> 인식의 힘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주체를 가지고 뚝심있게 살아가면 이곳이 어디든 감옥이 아니라 수도원으로 살아갈수 있겠지?
p. 255 후는 원장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틀리지 않은 말을 하는 원장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다른 문제였다. 말의 내용은 옳지만 말하는 행동은 옳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어떤 옳은 말은 말해지는 순간, 말해졌기 때문에 옳지 않은 것이 된다. 어떤 옳은 말은 옳음을 유지하기 위해 말해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말해지지 않으면 그 말이 옳다는 것을 이해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 말이 옳다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말을 하는, 옳지 않은 방법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옳지 않은 행동을 통해서만 옳음이 증명된다는 것,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옳지 않음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옳지 않은 실천을 통해서만 그 옳음을 이해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 후는 연희누나를 찾으려 전국의 미용실을 전전하고 있다. 미용실 원장은 그런 후에게 지금의 방법이 시대착오적이고 비능률적이라며 충고를 건네는데 이에 대해 후가 느끼는 감정이다. 후 역시 자신의 방법이 한계가 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런 인식 자체, 즉 행동에 대한 반성이 또 다른 행동에 제약을 줄까봐 애써 그 감정을 외면했다. 원장의 말은 옳았지만 말하는 행동은 이미 한계를 느끼고 있던 후에게는 옳지 않았다. 나중에 원장의 제안이 (지체 높은 사모님을 후보고 담당하라고 했던..) 안좋은 결말을 낳았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는 문단인 것 같다.
p. 279 그는 불현듯 자기가 쓰고 있는 가면을 자기는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안도했을 뿐 무슨 가면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기가 무슨 가면을 쓰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야 하는데, 그러면 자기 얼굴을 노출해야 하기 때문에 그럴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중략-
p. 291 "혹시 저 무수하게 많은 굉장한 말씀들이 젊은이의 현실에 아무 작용도 하지 않아서 마음 상해 있다면, 주제넘다 말고 내 말을 들어 봐요. -중략- 말씀이 굉장한 것은 현실을 이기기 때문이 아니라 현실을 넘어서기 때문이에요. 현실에서의 철저한 무능이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말씀의 능력을 역설적으로 증거하는 거예요. 엉뚱한 데에다 말씀을 들이대지 말아요. 세상은 언제나 악하고 어느 시대나 힘이 세고 어디서나 무자비해요. 그러니까 젊은이, 외람되게 충고하는데, 그 때문에 절망하거나 마음 상해하거나 넘어지지 마요."
-> 어떤 나이든 남자가 길에 쓰러져있던 후를 병원으로 옮기며 한 말이다. 종교를 떠올리며 많은 사람들이 가지는 의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좋은 말들만, 언뜻 언뜻 이해되는 말들만 적힌 성경과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 인류를 구원한다는 전지전능한 신은 때로는 무자비하게 무심하다. 말씀들을 통해, 성경을 읽으라기보다는, 끊임 없는 고민과 성찰을 통해 "세상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고 싶다. 작가는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과 상관없이 살 수 있는 초연함을 주는 것은 "내 안에 충만한 말씀" 이라고 글의 후반부에 명확하게 제시한다.
p. 295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대개 할 수 없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고 싶지 않다는 위장이 필요하다. -중략- 현실의 실패를 내장한 성공, 그러니까 이것은 기만이고 도피고 거짓 성공이다. 이 성공은 때때로 현실의 가학성에 의해 그 기만성이 폭로된다.
-> 나 역시 이렇게 나약했다. 할 수 없는 일들을 피하기 위해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고, 정말 하고 싶지 않아졌다.
p. 314 많은 고통은 많은 더러움을 상기시켰다. 그는 깨끗해지기 위해 큰 치욕과 많은 고통을 필요로 했지만, 그러나 큰 치욕과 많은 고통은 그의 크고 많은 더러움을 호출할 뿐이었다.
-> 책의 앞쪽에 나왔듯. 내가 무슨 가면을 썼는지 보려면 가면을 벗어야하는데, 가리기 위해 쓰고 있기에 벗을 수 없는 그 난감함. 이 역시 깨끗했던 그 때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얼마나 처절한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느낄 수 있었다. 삶은 이토록 처절하다.
p. 344~ 346
켈스의 책
카타콤 : 초기 기독교 공동체 신자들의 지하 무덤
체메테리움 : 쉬는 곳 이라는 뜻으로 카타콤을 이렇게 불렀다 함 <-> 네크로폴리 (죽은자들의 장소)
"세상의 권력은 그들의 구별된 공간인 천산을 침범하고 파괴하여 카타콤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침범하고 파괴하는 권력이 행사되는 이 세상이야말로 카타콤에 다름 아님을 그들의 구별된 삶과 특별한 죽음으로 증거했다. "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부정되었지만, 그 전에 세상은 그들에 의해 부정되었다. 세상은 그들을 버렸지만, 그전에 그들은 세상을 버렸다. 어떤 의미에서는 버려지는 것이 그들이 세상을 버리는 방법이었다. 세상은 더 이상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간섭하지 않았다.
-> 카타콤이 뭔지, 체메테리움이 뭔지 알려주지 않으면서, 각 챕터의 제목은 그것들이었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단어들 덕분에, 더 갈피를 잡을 수 없었고, 덕분에 더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작가는 이리도 친절하게 독자들에게 정리를 해 준다. 자세히 설명해준다고 해서 촌스러운 것은 아니다. 완벽한 엔딩이다. 난 작가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권력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성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라는 근원적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