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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o Aug 09. 2015

마스터(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을 보고

주인과 노예의 역전

영화 시작 전 화면에 뜬 the MASTER라는 제목에서,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Dialectic of master and slave)이 생각났다. 나를 나로 의식하는 근거인 자기의식들이, 같은 자기의식들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균등한 형태를 갖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관념론적 관점에서 설명하기 위해 주인과 노예의 관계를 제시한다. 헤겔은 여러 자기의식들 중 진정한 자기의식은 “타인이 나에게 하려고 드는 행위”와 “ 나 스스로 하는 행위” 사이에서 후자가 전자를 압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자기의식은 “자기자신의 목숨을 건", 또는 "생사를 건 투쟁"을 통해 '나'가 "자기자신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받을 때만 가능하다. 이런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를 주인, 그렇지 못한 존재를 노예라 칭한다. 그런데 이런 관계는 언제나 역전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다. 노예는 일차원적으로는 주인에게 종속되어 있지만, 주인은 자기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예에게 의존하게 되어 결국 주체성, 자기의식을 상실하고, 노예는 (주인을 위한) 노동을 통해 결국은 자기의식을 획득하게 되어 주인과 노예의 의식상태의 역전이 발생한다는 이론이다.

영화 제목은 마스터, 즉 표면적으로는 랭케스터를 내세우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노예인 퀠의 이야기이다. 영화 내내 퀠이 짠했던 것은 자기의식을 찾기 위한,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처절함과 절실함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정신이상자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한 명의 인간에 대한 이야기였기에 느낀점을 어떻게 풀어내야 할 지 난해했지만 마음 속으로부터 공감은 갔다. 퀠은 미숙하고 촌스럽고 이상했지만, 퀠이 자기의식을 찾아가는 그 과정은 숭고하고 우아했다.

랭케스터와 퀠에 대해 이야기해보면, 이들은 주인과 노예처럼 초반엔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다. 정신적으로 불안한 퀠은 마음 넓은 심리치료사인 랭케스터가 거두어주었고, 랭케스터는 자신의 다음 책을 위해 자신의 이론을 증명해줄 실험의 대상이 되는 퀠이 꼭 필요했다. 처음엔 랭케스터가 완벽해보이고, 퀠의 결핍을 랭케스터가 채워준다고 생각했지만, 사이비교주 같은.. (흡사 싸이언톨로지와 유사한..) 랭케스터의 논리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 보인다. 영화는 여러가지 실험들을 통해 둘 사이 권력의 긴장을 보여준다. 자신과 타인 사이의 권력이기도 하고, 내 안의 자기 의식들 사이의 권력이기도 하다. 랭케스터와 퀠은 분리된 존재이기보다 하나이면서 서로 다른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결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된다. 퀠이 스스로 자유를 찾아서 랭케스터에게서 해방되었다고, 혹은 오토바이를 타고 목표를 향해 떠났던 퀠이 랭케스터에게 다시 돌아왔던 것처럼 진정으로 해방되지 않았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목표를 향해 떠나는 (물론 랭케스터의 제안이었지만) 퀠의 뒷모습에서 주인과 노예의 역전을 보았다. 나중에 민트 담배를 들고 자기 발로, 자기 의지로 스스로 걸어온 퀠의 눈동자에서는 자기의식을 되찾은, 그동안의 처절함이 느껴져서 마음이 시렸다. 그 눈빛은 내가 잘 못 본것이 아니라면, 한 성숙한 인간의 것이었다.

+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을 1950년대 전쟁이후 미국의 황금기로 했다는 점도 언급하고 싶었으나 점점 더 두서없어질 것 같아 관둔다. 다만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 이후 승리국가들은 점점 부강해졌으나 그 속의 인간들은 발전해가는 시대상과 전쟁 후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불안과의 괴리감에 더욱 결핍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영화의 이야기는 덕분에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불안에 떨고 결핍에 시달리는 모든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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