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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May 14. 2020

옮겨 적으려면 사랑에 푹 몸을 담가야 한다

200406 회사 작당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가수님은 글도 쓰신다. 지갑으로 그를 서포트하는 나는 당연히 책이 나올 때마다 아마존 재팬에서 공수한다. 다행히 초등학교 5학년 시절부터 갈고닦은 덕력 덕분에 일본어 사전을 동원하면 그럭저럭 읽힌다. 그렇게 끝냈으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갔으련만, 참을 수 없는 오지랖이 치밀기 시작하니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넘치는 마음에 사버린 책을 두고 읽지 못하는 팬들이 꽤 많았다. 그래서 나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야금야금 발췌해서 번역하기 시작했다. 느린 작업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부지런히 하는 수밖에 없다. 매일매일 분량을 정해놓고 조금 해두고, 조금 올리고 그러기를 반복했다. 신조어에 당황하고, 특유의 만연체에 질색팔색 하고 그랬지만 제법 쏠쏠한 재미도 있었다.


번역 작업을 하면서 완벽한 직역은 불가능하다고 믿게 되었다. 두 개의 언어가 완벽히 일대일 대응이 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이 언어에 있는 말은 저 언어엔 없고, 그런 예가 곧잘 보이듯이, 일본어에서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도 적절한 의역이 필요하다. 이 단어로 전달하는 게 제일 매끄럽지 않을까, 곰곰 고민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의역이 등장하는 순간 번역문은 원저자의 작품이자 번역가의 작품이 된다. 하나의 글에 주인이 둘이 되는 셈이다. 원저자는 무단으로 번역해놓고 주인이네 마네 하는 게 괘씸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참을 수 없다. 퇴고까지 끝낸 번역문을 보고 있으면, 완전히 내 새끼다. 그렇다 보니 내 멋대로도 고쳐보고 싶고, 원문에 묶여있더라도 최대한 자율성을 발휘해서 더 예쁜 모습으로 가꾸어서 선보이고 싶다. 반복해서 등장하는 같은 단어를 맥락에 따라 다른 표현으로 옮기는 건, 본래의 의무를 넘어서고픈 번역가의 잔재주이자 애정인 거라고 너그럽게 봐주었으면 한다. 


신작이 없어 번역 활동도 뜸해가던 즈음 불과 며칠 전에 그의 에세이집 하나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 시국에 출간이라니, 그것도 모르는 사람이 없는 탄탄한 출판사에서, 세상에 나온 지 3년이 된 책을 말이다. 의아해하며 서점에 들러 한 권 업어왔다. 이미 일본어판으로 소장해두고 있음에도 똑같은 책을 사온 건 미약하게나마 팬으로서 도리를 다 하려는 마음도 있지만, 번역을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다. 분명 나보다 더 실력 있는 전문가일 테니 혹시나 내가 저질러놓고 알아채지 못한 오역을 제대로 번역해뒀을 수도 있다. 비루한 어휘력으로는 떠올리지도 못할 딱 들어맞는 단어를 가져와 문장의 의미를 살려냈을지도 모른다. 적절한 번역이 있다면 기억해두었다가 써먹을 생각도 했다.


우선 펼치고 쭉쭉 읽어봤다. 일본어판에는 없던 게 눈에 띈다. 옮긴이가 적은 수많은 각주다. 가수나 배우 등 연예인의 이름은 물론 고유명사가 나왔다 싶으면 어김없이 각주가 달려있다. 저자의 팬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었을 법한 내용부터 찾느라 애썼겠다 싶은 것도 있었다. 현지인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가 자주 등장하니 독자들을 이해시키려면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거다. 그 말인즉슨 이걸 읽는 독자들에게 원저자의 의사를 온전히 전달하려는 의지 없이는 이런 상세한 각주가 없었으리라. 이런 정보들을 다 찾는데 들어갔을 시간만 해도 어마어마하기 때문이다. 번역가의 직업정신인지, 순수한 덕심에서 우러나온 힘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왠지 각주의 세심함에서 후자가 아닐까 상상하게 된다. 귀여운 일이다. 맥락 없이 이 책을 불쑥 한국에 내보이려고 애쓴 편집하며, 세심한 각주투성이의 번역까지 애정이 들어가지 않은 부분이 없다. 그래서인지 이 에세이집의 한국어판은 어째선가 원저자보다 편집자와 번역가 둘의 노력이 더 두드러져 보인다. 


책을 옮겨 적고 세상에 내보인다는 건 얼마나 사랑스러운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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