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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Jul 01. 2020

데카르트형(形) 인간의 수감 생활

200626_회사작당



몸 움직이기를 좋아하는 활달한 팀장이 그런 말을 했더랬다.


“몸은 잘 기능하면 좋은 도구지만, 그렇지 못하면 감옥이지.”


그렇게 치자면 벌써 난 25년 하고 5개월을 꽉 채워 옥살이를 하고 있는 셈인가. 새삼 깨닫고 절로 고개를 끄덕인다. 장기수도 이런 장기수가 없다. 모범적으로 지내 가석방이라도 되든지, 아니면 탈옥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안 된다. 몸뚱이란 게 아직은 그렇다. 몸, 이 지긋지긋한 몸. 차라리 없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육체가 없으면 아예 존재조차 증명이 안 된다는 난제가 자리하고 있지만 그만큼 지워버리고 싶은 게 내 몸뚱이다. 


SF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기계로 대체할 수 있는 대(大) 사이보그 시대가 도래하면 겨우 해방될지도 모른다. 눈알을 좀 갈아 끼우고 싶은데, 시력 4.0으로. 아니, 그전에 툭하면 체하는 이 위장부터 싹 바꾸자. 휘어버린 척추도 곧은 걸로 바꾸고 말이다. 이럴 바엔 아예 몸을 싹 새 걸로 교체하자! 마치 서유기에 나오는 해골 요괴 백골정마냥 그때그때 적절한 몸으로 왔다 갔다 하련다. 근데 그 정도의 기술이 상용화되려면 난 이미 쪼그랑 할망구가 되어 있거나 죽었거나 둘 중에 하나겠지. 그러니 언제나 망상의 끝은 이 육체에 붙잡혀 있다는 자각이 된다. 도망칠 수가 없다.


이런 결론에 도달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꼬맹이 시절부터 절절히 느끼고 뼈에 새기던 추론이었다. 그렇다고 이 몸을 그대로 포용하기란 어려워서, 그 꼬맹이가 택한 전략은 무시였다. 머릿속에서 몸을 싹 지우는 것이다. 이렇게 움직이면 더 멀리 뛸 수 있다든지 하는 제어 감각 같은 것들을 다 내몰았다. 덕분에 어렸을 때 진즉 익혔어야 할 우습지 않게 뛰는 법, 균형을 잡는 법, 재빨리 움직이는 법 등을 다 모른 채로 어른이 되어버렸고 흔히 말하는 운동신경 없는 사람으로 거듭나고 말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이 있다는 것을 말끔히 머릿속에서 지워내려면 내 몸을 보아서는 안 됐다. 그래서 가급적 거울을 보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렇게나 옷을 입었다. 여자애면 좀 예쁘게 하고 다니라는 엄마의 잔인한 잔소리에도 마치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초연한 척, 무심한 척 굴었다. 실상은 전혀 태연하지 못했다. 옷가게에 끌려가는 것만큼 괴로운 일이 없었다는 게 그 증거였다. 높은 확률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어떻게든 입어보려 애써야 했다. 내 몸이 여기 있음을 느끼는 데 그만한 게 없었는데, 외면했던 실상이 낱낱이 밝혀지고 모종의 인간군상에게 조롱당하는 기분이었다. 종업원이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나서서 “아휴, 쟤가 살이 쪄서…”하며 딸을 매도하는 엄마의 목소리는 덤으로 얹혔다.


아예 근본적으로 뒤집어보려고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강박적으로 매일 운동을 했다. 잘 움직이고,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몸을 가지려고 모아뒀던 돈을 쏟아부어 PT를 받았다. 덕분에 아주 잠깐 동안은 정상 체중을 획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십 년 이어온 이 짓거리들 속에서 나는 실제와는 상관없이 내 몸을 혐오하게 되었다. 언제나 육체는 교정과 검열의 대상이고 가급적이면 존재 자체를 지워버려야 속이 시원했다. 정신과 육체 가운데 정신만을 오직 나의 본질로 이해하려는 데카르트형 인간이 탄생하고 말았다.


복역 생활은 계속되고 있다. 필연적으로 평생 그럴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채워진 쇠사슬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보이는데, 아직 어찌 행동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열심히 구분 지으려 애쓰고 있지만 사실 자기혐오나 마찬가지인 이 의식의 감옥에서 나는 어떤 생존 전략을 취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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