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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DA Jul 08. 2020

범퍼, 범퍼, 범퍼카

예기치 못한 충돌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님을 알게 되었을 땐


    놀이공원에 가서 범퍼카를 타보지 않은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올라타든, 혼자 핸들을 쥐든 범퍼카는 퍽 많은 사람들의 추억거리로 남아있다. 그런데 난 범퍼카를 타본 적이 없다. 무서웠다. 벽이나 다른 차에 부딪히면 그대로 휘말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우연의 세계가 귀신의 집보다 더 공포스러웠다. 그저 의도했던 바대로 내 갈 길 가고 싶어 하는 심약한 어린아이가 바로 나였다. 다른 데서도 마찬가지였다. 마음먹어둔 길을 벗어나는 엉망이 되는 게 무척이나 싫었다. 그건 곧 미션 실패나 다름없었다. 그래서인지 실패로부터 도망치려는 늘 애썼다. 그러려면 성공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패로부터 도망치는 일은 곧 성공을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 외의 선택지란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듯이 말이다.


    실패로부터 도망친다는 건 단순히 성공을 쟁취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도망치는 과정에서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은 목표를 달성했을 때의 환희라기보다 가능한 한 가장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실패의 현장이다. 만일 내가 정말 실패한다면 영구히 그 고통 속에 갇히고 말 거야, 주문을 외웠다. 그러면 마치 맹수의 추격을 받는 가젤처럼 달릴 수 있었다. 폭발적인 에너지로 실패하지 않기 위해, 목표를 위해 정신없이 달렸다.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 그린 실패의 풍경은 희미해지고 어딘가 안전한 지점에 다다랐다. 막연히 그렸던 성공 지점을 훌쩍 넘은 것이다. 그리고 내 몸엔 ‘참 잘했어요’ 도장이 꽝 찍혔다. 살려고 달렸을 뿐인데, 전혀 예상도 못했던 성취가 쌓였다. 전혀 내 것이 아닌 것만 같이 느껴졌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 효과도 썩 나쁘지 않아서 공포와 두려움의 정치로 스스로를 굴리는 일을 그만둘 이유가 없었다. 반항이니 사춘기니 전혀 모르는 착한 딸을 자처했다. 학생의 본분이라고들 하니 공부도 당연히 빈틈없이 잘해야만 하는 줄 알았다. 홀로 상경해 부모님의 평생 자랑이 될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퓨즈가 끊어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제일 중요한 때에 툭하고 끝장나버렸다. 그때 나는 대학 졸업반에다 행정고시 2차를 준비하던 고시생이었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는 정도(正道)였기 때문에 시작한 고시는 떨어지면 꼼짝없이 1년을 기다려야 했다. 덕분에 나는 그 한 해의 무게를 매일 새기며 도서관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게 조금 벅찼나 보다. 조금씩 “왜?”라는 질문이 움텄다. 왜 공부하는 걸까? 왜 이 시험에 매달려 있을까? 왜 떨어지면 안 될까? 왜, 왜, 왜? 머지않아 눈 떠서 잠들 때까지 공부만 해도 모자랄 고시생의 머릿속에는 하루 종일 “왜?”라는 질문만이 남아 메아리쳤다.


    고민이 반년이 넘어가던 2차 시험 마지막 날, 결국 나는 그렇게도 피하려 했던 실패 속으로 스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는 수험서를 펼치지 않았다. 고작 고시 생활 1년 차에 어떻게 이리 금방 포기해버릴 수 있냐며, 가족들과 지인들은 실망감을 토해냈다. 누군가는 진심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너 정도면 조금만 더 참으면 할 수 있는 걸 대체 왜”라고. 옛날의 나였으면 조금만 더 참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닌 걸 어떡하냐는 변명 한 마디도 못했다. 예기치 못한 충돌에 얼얼해져 스스로도 갈피를 잡지 못했던 것이다.


    이토록 대놓고 나 실패했다고 외쳐본 적이 있었던가. 고시 포기자에게 예정된 단죄가 찾아오기 전에 도망치고픈 마음이 가득했다. 앞으로 삶을 어찌 꾸려가야 할까 생각하면 아득하기만 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을 끌고 나아가는 것 자체가 막막했다. 그동안은 노선을 이탈하는 게 두려워 앞만 보고 달렸다. 공포를 연료 삼아 달리는 것을 멈추고 나니 이제 뭘로 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두려움의 정치가 무너지니 혼돈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어찌어찌 살아지는 게 또 삶인가 싶다. 지금은 고시를 포기한 것이 살면서 한 최고의 선택이라고 생각할 만큼 후회도 두려움도 없다. 물론 아직도 나를 이끌어가는 데 있어 두려움을 대체할 만한 연료를 찾지는 못했다. 그저 왜 그리도 두려움이 효과적이었는지를 짐작만 할 따름이다.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공의 전망이 있고 그 외의 것을 실패라고 할 때 어느 수준까지 굴러 떨어질지 상상하면 아찔하다. 마치 성공의 길만 밝게 빛나고 나머지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겨 있을 때 느끼는 미지에 대한 공포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 같지 않을까 싶다. 어둠 속에서는 시야가 가로막히듯 우리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성공의 길 이외에는 모른다. 정보가 없다. 실상 우리가 여기는 실패가 진정 종말이 아니라 또 다른 방향으로의 전환일지도 모르는데, 그걸 곧잘 잊는다.


    사는 건 범퍼카를 모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한다. 한 방향으로 마구 돌진하다가 쾅하고 벽이든, 다른 차에든 부딪힌다. 그러면 드라이버는 이리저리 방향을 살피고 거기서 또 되는 대로 질주한다. 다시 부딪힌다. 몇 번 반복하다 보면 쾅쾅 부딪히는 그 순간이 제일로 재미있다. 삶에서 예정했던 바와 달리 현실에 부닥치는 걸 실패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 충돌의 순간이 항상 진짜 실패이기만 할까, 충돌로 살짝 어긋나 버린 위치가 주는 새로운 시야란, 우리가 전혀 예상도 못했지만 또 나름대로 괜찮은 것일 터인데 말이다. 행여나 걱정이 들더라도 안심하자. 괜히 범퍼가 달려있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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