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문에 vs 덕분에
삼십대 직장인 L양. 늘 봐도 예쁜 후배다. 연말연시가 되자 문득 ‘정리 좀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한다. 흠, 기특하기까지. 무엇을 어떻게 ‘잘’ 보내고 맞이할까? 그녀는 한 해 동안 써온 업무일지 겸 일기장을 들춰보고, TV특강도 좀 보고, 인터넷 검색에, 서점도 기웃거려 본다.
때가 때인 만큼 도움을 주겠다는 메시지들은 풍성하다. 그걸 압축해 보면 대략 이렇다. “이전의 묵은 것, 전부 잊고 홀가분하게 새로 시작하면 된다.” L양은 곰곰이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쉽게 될까?’ 격려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의지를 붙여놓으면 마음이 다소 가뿐해질 수도 있겠지. 그런데 며칠도 되지 않아 이런 사회적 바람직성과 자신의 현실이 점점 괴리가 되고 있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 매년 통과의례처럼 겪는 이런 쳇바퀴, 데자뷰 상황들. ‘올해만큼은 좀 다르게 살고 싶다.’는 그녀 바람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사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건 사람세상의 흔한 일상이다. 그 누구라도 편치 않다. 당신과 나의 처지는 어떠한가.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몸이 못 따라간 일들, 어디 한두 번일까. 마찬가지로 몸이 앞서 저지른 일을 마음이 수습 못한 건 또 어떻고. 게다가 세상 일이 어디 내 맘과 같던가. 소속 사회, 직장, 가정의 일원으로서 관계와 입장으로 얽혀 이도저도 아니게 된 일들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로 인해 틀어지고 망가지고 자책하고 후회한 일을 따지자면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을 다 모아놓고 ‘한심함의 크기’를 재봐야 하는 처지일 수 있다. 게다가 어떤 일들은 세월이 지났건만 내가 원했던 것, 정말 좋은 것이 뭐였는지 지금에 와서도 판단이 바로 서지 않는다. 이거, 원...고해苦海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중생衆生의 꼴에 다름 아니다.
바람직한 것과 현실 사이
그런데 잠깐. 요 대목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새삼 질문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사람을, 삶을, 행복을 뭐라고 생각하는가?” 어떻게 정의하는지 이론적으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느낌’을 묻고 있다. 생생히 겪어온 ‘사실’을 묻고 있다. 이 둘을 합친 ‘진실’을 묻고 있다. 바람직한 게 뭔지 배운 것을 묻고 있지 않다.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꿈을 묻고 있지 않다. 내가 말을 꺼냈으니 내가 먼저 말하는 것이 좋겠지. 내 얘기를 들으며 당신은 당신 생각의 지평을 넓히기만 하면 된다.
스스로에게 화두부터 던져보자. ‘나, 좋은 사람인가? 내 삶, 잘살고 있는가? 행복, 누리고 있는가?’ 한번 짚어본다면 반드시 얻을 게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변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의 영역’이다. 자신 없다는 뜻이다. 생각, 몸, 나, 당신, 관계, 상황, 입장, 역할 등등 시간과 공간에 따라 무쌍한 동시다발同時多發의 것들이 어떻게 하나의 질문과 답으로 떼어 정리될 수 있을까. 게다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이라니! 우리 삶이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우린 ○와 ×가 교차하거나 공존하는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서 같은 순간에도 좋음과 나쁨이, 성장과 퇴보가, 즐거움과 고통이 동시에 존재하거나 거듭, 번갈아 일어나는 경험을 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심리학에서는 건강한 삶의 키워드는 ‘조화와 균형’이라 말한다. 선한 사람이냐, 사회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성취했느냐, 특정 분야에서 남다르냐에 잣대가 있지 않다는 것이다. 즉 사람다움의 판단은 오직 당신과 신,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일이므로 타인의 기준, 주장에 영향 받거나 따라갈 필요가 없다. 그러니 이제 그만, 스스로 만든 부담으로부터 벗어나도 된다.
내가 볼 때에는 딱 그게 가장 ‘사람다운’ 사람의 본모습이다. 앞서 L양처럼 어떻게든 달라지려고 애쓰고 노력을 거듭했다면 분명 한걸음이라도 나아갔을 것이고, 한 계단이라도 올라섰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면 ‘뭐라도’ 있고 안 하면 ‘아무 것도’ 없다. 어제 무너졌더라도 오늘 세우면 된다. 나날이 무수한 ○와 ×로 점철 된다 해도, ‘○로 시작해서 ×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음에는 반드시 ○가 오는’ 인생으로 살면 그만이다.
지내온 날들을 잘 생각해 보면, 어느 특정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걸 되돌리려거나 바로잡으려다 생긴 억지와 조바심이 늘 부조화와 불균형을 만들어내곤 했다. ○냐, ×냐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를 ×라고 우기거나 ×를 억지로 ○로 만들려고 무리를 가했을 때 문제는 일파만파로 번지거나 눈덩이처럼 커졌다는 것이다.
‘때문에’와 ‘덕분에’의 사이
그렇다면 우리는 올해 바람대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는 단초를 얻게 된다. 거창하거나 과할 게 없다. 삶 가운데에서 받아들이기 힘든 것을 만나면 애써 견뎌내고 좋은 것은 더욱 키우며 살면 된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고, 즐길 수 없으면 멈추는 용기가 관건이 될 것이다. 어떤 일이든 결과가 있는 것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올 때 원인을 바라보며 ‘~때문에’의 회한에 빠져드는 대신, 좋은 결과의 원인을 찾아 ‘~덕분에’의 감사를 찾아 더욱 키우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변모, 성장할 수 있다.
‘막연한’ 긍정 마인드의 자기최면에 빠지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더 이성적으로 ‘진짜’ 덕을 보게 한 그 원인을 면밀히 살피자는 것이다. 성공한 사업가로 잘 알려진 오랜 지인 K씨. 그의 창업 배경에는 진급 누락이후 회사를 스스로 그만두어야 하는 막다른 상황이 있었다. 그 아픔 ‘덕분에’ 새로 시작할 수 있었고, 고마운 분들의 도움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고, 뜻을 같이한 동료 ‘덕분에’ 유지할 수 있다고 그는 진심으로 감사한다. 이런 사례는 당신도 충분히 가지고 있다.
올해를 펼쳐가면서 꼭 기억할 것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때문’은 여전히, 앞으로도 불편과 아픔을 주며 ‘덕분’과 더불어 공존한다는 거. 그것도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흔쾌히 받아, 지혜롭게 넘겨보자. 그래서 ‘덕분’에게 ‘때문’이 기를 못 펴게 해보자. 마음이 힘들 때에는 건강한 몸으로 마음을 도와주자. 몸이 아플 때에는 밝은 마음으로 몸을 다독여주자. 혼자서 힘겨울 때에는 힘듦을 인정하고 타인과 세상에게 손을 내밀자. 실존이 힘겨울 때에는 신앙의 도움을 찾고 받자. 그런 삶을 진심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언젠가는 결국 누군가의 ‘덕분’이 되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