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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명찬 Feb 14. 2020

사계 노트

Summary


《봄》

봄으로써 사랑도 꿈도 시작되었다. 태초의 땅에는 아마도 단 하나만 있었던 계절 이름이었을 것. 빛 한 가운데 있었기에 그림자도 없었을 것. 그것을 깨닫기까지 어디 한 바퀴 돌아올 필요도 없었을 것. 지금은 단지 커튼을 활짝 열어두고 고마워할 따름이지만. 훗날 당신 앞에 잠잠히 설 때 그리움과 두 손 맞잡고서, 봄.       



《여름》

큰 유리창으로 햇살이 확 쏟아진다. 네 집이냐. 들어오는 게 아주 거침없다. 더위에 내내 기운 없더니만 등짝 위에 대상포진 한 덩어리를 철썩 얹어준 여름. 후유증으로 남은 신경통이 은근 도지려 한다. 책상 위 걸터앉은 햇살이 달가울 리 없다. 구름이 지나가면 비를 생각한다. 여름 태양은 물놀이할 때만 잠깐, 뜨거운 사이.     



《가을》

아무래도 나이든 머리구조가 의심스럽다. 제대로 찾아 온 가을. 건너 뛴 적도 없을 텐데 여름과 가을의 경계를 기억하지 못한다. 기념일 몇 개를 챙기고 9월을 보냈던 건 생각난다. 그래서인가보다. 무언가 기념한다는 것의 진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그 전후로 살아있었음이 증명되니까. 10월쯤 펼쳐 보는 노트, 줄과 줄 사이.       



《겨울》

봄과의 사이에 두 계절이나 끼어들어 있음에도 겨울은 늘 봄을 품고 있다. 에잇, 또 보는 방향이 틀렸네. 겨울은 봄으로 나아간다. 겨울은 봄을 자신의 눈으로 봄으로써 혹독한 것의 알맹이는 선한 것이었음을 마침내 증명한다. 때론 억울함을 피하지 못한다. 그럴 때는 묵묵히 기다릴 뿐. 두꺼운 외투 속에서 목만 빼고서,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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