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스가 좀 필요해
인생은 B, C, D라고 한다.
태어나고Birth, 죽는Death 사이에는
늘 선택Choice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다.
그럼 A와 E는 뭘까.
B 앞에는 목표Aim하는 게 있었겠네, 싶다.
D 뒤에는 묘비명Epitaph이 남았겠네, 싶다.
뭘 겨냥하고 시작했나, 나는.
묘비명에다가는 뭐라 얼버무릴까.
S씨는 지방으로 간만에 차를 몰았다. 직장 동료의 결혼식이 있던 날. 새내기부부를 듬뿍 축하해주고, 반가운 얼굴들도 보고, 맛있는 것도 잘 먹었다. 그리고 늦은 오후, 거의 집 근처까지 왔을 때 그는 자동차 천장이 빙글빙글 도는 걸 느끼며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 차는 벽을 들이받고 멈췄고, 그는 병원 응급실로 급히 옮겨졌다. 머리와 달팽이관이 깨진 중상이었다.
그는 이내 깨어났으나 제대로 사태 파악이 된 것은 한참 후였다. 사고 당시로부터 약 3주후까지 아무 기억을 하지 못했다. 정신을 차린 후 아내로부터 당시 상황의 심각성을 전해 들었다. 목숨을 잃거나 전신마비, 의식불명 등이 예상 된 상황이라니. 뇌수술 직전까지 갔다가 면한 일도 기가 막혔고. 그렇게, S씨의 인생 2막은 뜻하지 않게 시작되었다.
죽음의 문턱을 딛어 본 소회는 의외로 담담했다. 사고 상황을 겪기 전에 기절했던 터라 끔찍한 기억, 트라우마도 없었다. 가끔 머리를 비롯한 몸 여기저기에 신경통이 있었으나 그럭저럭 참을만했다. S씨는 감사의 마음으로 묵묵히 생각했다. ‘이 일을 겪은 의미는 뭘까?’ 그리고 그해 말, 모든 걸 뒤로 하고 정든 회사를 떠났다. 그의 마음에는 한 가지 결심이 섰기 때문이었다. ‘이후의 삶이 나날이 모험일지라도 이제는 나를 위한, 내 삶을 찾아야겠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나름의 수명이 있다. 그렇다고 세상에 온 순서대로, 평균 수명대로 살다가 가는 것도 아니다. 삶처럼, 죽음도 특별할 게 없는 일상이다. 문득 돌아보면 우리 곁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많다. 닥쳐보면 ‘나’의 이야기로만 잘 안 받아들여질 뿐이다. 가족, 친구, 지인, 동포...생전에 가까웠을수록, 사연이 기막힐수록 보고 듣는 뉴스의 충격이 깊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톨스토이의 중편소설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주인공의 예고된 죽음 앞에서 이를 바라보는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해석이 존재함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삶의 반대선상에서 ‘문턱’으로 존재하든, ‘통로’로서 존재하든, 그 다음에 어떤 세상이 기다리든 간에 가장 중요하고 분명한 것은 ‘여기’에 당신이 있고, ‘지금’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때로 삶은 죽음보다 두려울 수도 있다.
S씨의 이야기는 불과 몇 년 전에 필자가 겪은 실화다. 그에 앞서 소개한 ‘A와 E’ 이야기는 회사를 떠난 후 1년간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써서 낸 에세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에 살다>에 수록한 글이다. 살면서 겪게 되는 원치 않는 일들 앞에서 흔히 드는 생각은 ‘왜 나만?’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더 잘 안다. 직접 겪어보니, ‘고통’도 지혜롭게 소재로 사용하면 상장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말은 그리 달갑지 않다. 사실이긴 하지만, 큰 상처를 겪고 있는 중에는 그리 위로가 되는 말은 아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수습하고 정리하고 회복할만한 충분한 시간이기에. 그래서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지금, 누가 그게 된답디까!” 사회적 바람직성을 갖는 의미가 있다고 해서 다 약발이 있는 건 아니다. 센스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현대의학 덕분으로 평균 수명이 점점 늘고 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는 성경말씀에서 크게 더 나아가지는 못한 인생이다. 대략 그렇다면 나는 절반도 채 남지 않았다. 이제 아직도 많이 남은 듯 허세를 떨며 살지는 못하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다면 ‘잘살다(=‘부유하게 살다’)’의 집착에서 좀 벗어나 ‘잘 살다(=‘사람답게 살다’)’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 내가 앞으로 감당해야할 모험의 의미다.
당신은 어떠한가. 당신은 의미와 보람으로 충분히 생동하는 오늘을 살고 있는가. 혹 남의 욕망을 따라 브레이크 없이 이끌려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가. 또는 내 꿈, 내 행복만을 위해 타인들에게 협조를 강요하고 윽박지르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너무나 상황이 모호해서, 책 <피로사회>의 마지막 말처럼 ‘죽을 수 있기에는 너무 생생하고 살 수 있기에는 너무 죽어 있는’ 삶에 멈춰 있지는 않은가.
삶은 누구의 것이든 그 자체로 ‘절대숭고’하고 생명이 있는 것은 모두 귀하다. 내 삶이 그것들, 또는 그들과 공유, 공존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타인의 삶을 쉽게 예단해서도 안 되고 내 삶을 함부로 다뤄서도 안 될 일이다. 오늘 만들 행복의 단초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답게, 잘 살자는 것은 ‘관계’에서 비롯된다. 혼자서는 절대 행복할 수 없다. 유한한 삶. 그 목적이 ‘소유’에 있고 목적 달성에 성공했다면 당신이 사후에 가게 될 천국은 당신의 독점으로 인해 당신 외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써 모으고 나누는 이유가 ‘사랑’이라면 한 걸음씩 성장의 계단을 밟아 위로 올라가서 결국 군림의 왕좌에 앉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만나는 해피엔딩을 맞게 될 것이다. 경계선도, 벽도 없이 탁 트인 하늘, 자유로움과 환한 미소로 볼 수 있는 맑은 하늘 말이다. 그때 우리, 피천득 시인의 시에서처럼 ‘아름다운 이 세상,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라고 해맑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