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서 해결이 돼?
둘.
너도나도 좋아.
내가 말할 때 너 하나만 볼 수 있어서 좋아.
네가 나를 보고 들어줘서 좋아.
입이 아프도록 떠들고
이제 네 차례야, 할 수 있어서 좋아.
너 다음은 다시 내 차례여서 좋아.
중간에 끼어들어도 추임새가 되니 좋아.
마주 볼 수 있어서 좋아.
두 손 맞잡고 웃을 수 있어서 좋아.
한 손씩 잡고 산책할 수 있어서 좋아.
내일도 모레도 처음처럼 만날 수 있어서 좋아.
이렇게 좋을 수 있어서 참 좋아.
이십대 초반의 훈남 J씨. 아직 여친이 없다. 주변 친구들은 몇 번이나 생기고 사라질 때 언제나 혼자서만 솔로였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배필’이 있을 테니 기대하고 주변을 찬찬히 살피라는 어머니 말씀은 지혜의 말씀인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참 적적하고 외롭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 우연치 않게 ‘데이트학교’ 특강에 참석하게 되었다.
시작하자마자 강사는 A4용지를 나눠주더니 이상형에 대해 구체적으로 써보란다. 한 장이 모자라면 여러 장을 써도 좋단다. 걷어가지 않을 테니 마음껏 표현해 보란다. 성격, 생김새, 직업, 취미, 특기 등을 단답형으로 적는 수준을 넘어서 마치 그림을 그리듯 서술형으로 듬뿍 표현해보라는 것. 처음에는 ‘뭘 써야하나’ 안갯속 같더니만 잠시 후에는 묘한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이런 생각, 그동안 해 본 적이 없었다. 한 시간 동안, 참석자 모두는 열심을 다했다. 그 다음은 희망자들의 발표시간. 의외로 용기 있는 많은 이들이 앞에 나섰다. J씨는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작가 뺨치는 기발하고 섬세한 표현들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실컷 웃었다.
강사는 이렇게 정리했다. “자, 지금, 여러분이 그린 바로 그 이상형이 눈앞에 나타났어요...그 사람, 당신을 보고 과연 좋아할까요?”
‘둘이 만나 하나 되기’ 프로젝트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에, J씨도 그토록 그리던 그녀를 만난다. 나의 이상형인 그녀가 나를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말하는 꿈같은 일이 벌어진 거다. 달달한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에 골인. 연애의 관점에서 보면 해피엔드, 부부생활의 현실에서는 이제 ‘전쟁’의 시작이다. 전쟁이라는 표현을 오해 말기 바란다. 이후의 인생을 단 둘이서 함께 헤쳐 나가므로 부부는 틀림없는 전우가 아닌가. 서로를 지켜주기도 모자라는, 날선 흉기를 서로 들이대며 살기에는 너무나 짧은 인생이다. 그래서 검은 머리 파 뿌리가 되도록 잘 살아내는 게 철칙이다. 물론 이런 말이 처음 듣는 이야기이기나 할까.
그런데 어쩌나. 이혼율 세계 3위의 나라에서 사는 우리다. 몸서리칠 정도로 ‘내전’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그들은 말한다. “오죽하면 이래!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 맞다. 장난삼아, 아무 생각 없이 그럴 사람은 없다. 어떻게 찾은 ‘반쪽’인데... 그래서 두 사람 사이, 둘만 아는 고운 사연은 한 트럭으로도 모자랄 만큼일 거다. 그런데 언제부터, 어디서부터 빗나가고 엇나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A4용지 속의 ‘이상형’으로 돌아가 보자. 잘 생각해 보면 내가 기다린 건 ‘반쪽’짜리가 아니었다! 내가 심지어 0(제로)여도 그(녀)만 오면 온전히 한쪽이 될 거라는 기대가 들어있었던 건 아닐까. 반쪽도 못 되는 사람들끼리 만나 합쳐도 한쪽 되기 힘든 게 현실인데, 저만 좋을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런 얘기, 듣기에도 거북한, 심한 이야기일까? 아니다. 전 세계 곳곳에서 마구 벌어지는 일상 수준의 현실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배우자 또는 배우자 후보에게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채워줄 능력을 찾고 바란다고 한다.
이쪽 반쪽이 ‘반드시, 꼭 완벽해야만 하는’ 저쪽 반쪽에게 이렇게 요구한다. “자, 이제부터 나의 나머지 반 역할을 제대로 해봐. 일단, 지금 내 마음을 맞혀봐. 아니, 같이 몇 년을 지냈는데 몰라? 도대체 잘하는 게 뭐야? 왜 그렇게 제 멋대로야?” 이쯤 되면 분명해지는 사실 하나는 상대방도 딱 그렇게 말하고 싶다는 거. 그 생각은 못한다. 별꼴이 반쪽이라는 말, 안 할 수가 없다.
방향이 정해져 있는 말, 책임이 깃든 말
적어도 둘 사이에서 ‘나’라는 말과 ‘너’라는 말은 알고 보면 같은 말이다. 같은 말이 방향이 서로를 향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상대방이 배필이라면 나는 곧 너다. ‘너’의 만족스런 반쪽이 되어주지 못한다면 ‘나’는 나답지 못한 거다. 나도 내가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거다. 그러니 서로 알아가며 가르쳐줘야 한다. ‘너’가 모르고 있는 걸 지적하고 고쳐주라는 뜻이 아니다. ‘나’의 한계와 무지를 깨닫는 대로 ‘너’가 나를 잘 대처하도록 알려주라는 뜻에 가깝다.
또 한편으로 언제든지 서로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해줘야 한다. 살다보면 퇴보할 수도, 성장할 수도 있다. 퇴보하다가 성장할 수도 있고, 성장하다가 퇴보할 수도 있다. 물론 바람이야 성장이다. 둘이 힘을 모아 성숙한 하나가 되는 것. 넉넉한 하나가 되는 것. 그래서 내가 반쪽 인생 중일 때 만난 반쪽의 가장 큰 의미는 ‘가능성’이다. 그 가능성 때문에 당신도 짝에게 버림받지 않고 닦달당하지 않고 함께 꿈을 나누며 살고 있다. 모자람을 상대방에게 얹혀가며 덕 보려 했다가 여의치 않으면 판을 깨버리는 게 사회적으로 용인된다고 해도 그 다음 상황이 더 나아질 리는 없다. 이건 저주가 아니라 섭리다.
이런 사람이 있었단다. 아내가 질리고 싫어 바람을 피운 자. 내연의 여자가 생겼을 때 치밀하게 아내 버릴 음모를 꾸민다. 계획대로 이혼하고 새 인생 설계에 성공한다. 그리고 내연의 여자와 당당히 결혼한다. 여기저기 청첩장을 보내고 축복도 부탁한다. 자, 뭘 어쨌건 좋다. 틀림없는 사실은 이렇게 해서 다시 ‘아내’가 생겼다. 매사에 쿨할 것만 같았던 이 여자도 결혼 다음날부터 ‘아내 버전’이 된다. 일찍 들어오라고, 돈 좀 아껴 쓰라고, 술과 여자 조심하라고, 사람 되라고(?) 잔소리한다. 이거 원, 예전의 아내 버금간다. 그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이해와 사랑 없는 사람끼리 만나 이해하고 사랑하며 살 수 있다면, 그건 과연 기적이기도 남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