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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송이 Nov 14. 2023

나의 글 역사

언제부터 썼을까

어린 시절 송이는 답을 알면서도 손들 용기가 없는 아이였다. 자신 있게 해보고 싶어서 예습복습도 다 했는데 손을 못 든다. 어쩌다 정답을 말하면서도 염소 소리가 나고 얼굴이 빨개졌다. 그게 또 부끄러워서 머릿속에 잔뜩 쌓기만 하고 뽐내지 못했다. 다행히 초등학교 때는 국어, 수학, 과학, 미술, 체육 등 여러 종류의 대회가 많이 열렸다. 조용하고 용기 없는 아이들이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아주 좋은 통로였다. 말하기·듣기·쓰기, 국어 과목을 좋아했던 나는 글짓기, 시 쓰기, 표어 그리기를 주 종목으로 삼았다.     


대회 소식이 들리면 친구들은 싫어했고 나는 좋아했다. 심지어 기뻤다. 때가 됐다. 그 기간은 머릿속 창고 대 개방이다. 그동안 축적해 두었던 것을 원고지에 차곡차곡 옮겼다. 지우개 똥이 손바닥에 배길 때까지 썼다. 교과서가 알려주는 대로 글쓰기 방법을 하나씩 확인해 가며 썼다. 염소 소리와 빨개진 얼굴 없이 뽐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니까 할 수 있는 공을 다 들였다. 지금 생각해도 정성이 갸륵하다. 상 좀 받아보니까 어느 순간부터는 장려상인지, 우수상인지, 최우수상인지가 관건이었다. 떠나보냈던 원고지 10장이 금빛 상장이 되어 금의환향했다. 그 종이는 부모님의 행복이고, 웃음이고, 기쁨이었다. 방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상장을 붙이다가 더 이상 붙일 곳이 없어 클리어 파일에 껴 넣었다. 파일이 두꺼워지는 만큼 엄마, 아빠의 기쁨이 커진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기쁘진 않았다. 그 시절 글쓰기는 부모님께 드리는 효도였다.      


그때 단련된 글쓰기의 기본기는 학창 시절을 편하게 해 줬다. 상장이 쌓이는 만큼 자신감도 쌓였다. 글을 먼저 써두면 발표를 잘할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말주변도 좋아졌다. 손을 번쩍번쩍 들고, 반장도 하고, 회장도 했다. 제법 잘 살았다. 그러고선 수많은 대학 입시에서 낙방했다. 논술 때도 면접 때도 바보였다. 입력된 말만 내뱉는 로봇이었다. 교과서에 적힌 걸 잘 외운 사람, 자기주장 없고, 생각 없는 사람. 공부 잘하는 모범생은 맞는데 대학이 원하는 인재가 아니라는 결론이다. 불합격 통보를 연이어 받으며 여태 속으로 하던 글 자랑을 한동안 부끄러워했다.      


그런데도 글쓰기 솜씨는 여전해서 대학 동기들이 비명을 질러대는 리포트를 척척 써냈다. “누가 리포트 쓸래?”라고 물으면 “내가 쓸게, 내가!” 했다. 전공책 목차부터 색인까지 모조리 읽었다. 시험 시간에 주어진 B4용지가 몇 장이든 상관없이 글자를 꽉꽉 채웠다. 홀로 남아 8장을 적어내던 헌법 시험 때 교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정도 끈기와 정성은 남들이 못 가진 실력이야, 실력. 송이는 뭐든지 될 사람이야. 수고했어.” 아픈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말을 곱씹었다. 그렇게 교수님이 좋아할 만한 내용과 자기주장을 적절히 섞어가며 등록금을 벌었다. 학기 중에는 공부만 하고, 방학에는 아르바이트하면 되는 삶을 이뤘다. 대학원도 같은 방식으로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다녔다. 그 시절 글쓰기는 등록금이었다.      


직장을 다니면서도 글쓰기는 여전히 해야 했다. 계획하고 보고하고 제안하고 설명하고 안내하는 모든 일이 글쓰기였다. 같은 상황도 누가 누가 잘 표현하나, 누가 누가 더 그 사람 마음에 들게 쓰나 가 중요했다. 흔히 말하는 사회생활을 글로 했다. 그러다 대신 쓰는 사람이 됐다. 상사가 말로 대충 설명하면 그걸 10장 20장으로 풀어내고 설득하는 능력까지 갖춰야 했다. 점점 이상한 글을 썼다.      


첫 직장 면접 때, 자기소개서를 보고 글 잘 쓴다는 말을 들었다.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사회복지사 업무를 맡았다. 글 쓰는 일도 다 내 몫이었다. 그러다 국제협력사업을 준비하게 됐다. 회사에서는 유명 인사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계획서에 적으라고 했다. “참여 의사가 있으시대요? 어디까지 같이 해주실 수 있대요?” 다양한 질문을 했지만 답은 하나다. 일단 사업 따고 보자는 것이다. 현실 가능성도 안 보이고,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는 진정성도 못 느꼈다. “이거 진짜 그 사람들을 위한 프로젝트 맞아요? 아무도 그걸 생각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질문은 점점 뾰족해져 갔다. 그냥 하란다. ‘아니, 이걸 누가 믿고, 누가 투자해.’ 빛 좋은 개살구가 한 트럭이다.     


사업 제안 당일, 대표님은 팀장님을 불렀다. “김팀장, 이거 못 따면 알지? 사무실로 오지 말고 한강으로 가.” 그는 웃으며 입버릇처럼 하던 말을 또 뱉었다. 이해할 수 없는 내용, 거짓말, 동의할 수 없는 의견, 말도 안 되는 말을 말이 되는 것처럼 써놓은 종이 장은 힘이 없었다. 유명 인사도 안 통한다. 예상대로 망했다. 팀장님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강으로 가겠다고 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 하지 마시라고 했다. 내가 손댄 글 때문에 누군가 한강에 빠져버릴까 봐 겁났다. ‘글이 사람을 죽일 수도 있어.’ 이런 게 사회생활인가 싶어서 양심의 가책을 외면했다. 그 결과는 창피한 프로젝트 제안서, 거짓 영수 처리와 거짓 회의록, 거짓 결과보고서 5박스를 낳았다. 착한 일을 하면 모든 게 가려질 거라고 여기는 그곳이 경멸스러웠다. 그 시절 글쓰기는 사회초년생의 돈벌이 수단이자, 가면이었고, 괴로움이었다.      


이제는 가면을 벗고 쓴다. 누군가 가면을 씌우려 해도 쓰임 당하지 않는다. 마음에 손을 얹고, 머리를 굴려 가며 쓸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나를 지키는 무기와 방패 삼아 글을 사용한다. 한동안 글쓰기에 회의감을 가지고 괴로워했었다. 부끄러웠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내가 아니까 괴로웠다. 그러다 SNS에 짧은 글을 다시 올리고, 씀방에 안겨 다시 쓰며 회복했다. 지금은 괴롭지 않다. 행복하다. 한 문장을 써도 쓰고 싶은 걸 쓴다. ‘누가 어떻게 생각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탐구하지 않는다. 맞추지 않는다. 울타리 안에 갇혀 사는 게 아니라 울타리가 없는 드넓은 초원에서 자유롭게 뛰노는 기분이다.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위한 것. 지금 이 시절 글쓰기는 마음의 숨쉬기이자, 있는 모습 그대로 드러 낼 용기를 회복하고, 사랑받는 에덴동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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