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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유 Feb 18. 2022

27년 경력단절녀가 면접 본 날

그날은 이혼한 날


2015년 6월

그날은 이혼이 성립된 날이었다.


1988년 6월

24살, 난 선을 보고 53일 만에 결혼을 했다.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했던가..?

난  거기에 더한 미친 짓을 한 거지..


온실 속 화초처럼 세상 물정 하나도 모르는 내가 결혼을 했다.

그때도 순진하지만 용감했구나.

여대를 나온 난 이상적인 결혼의 환상만 가지고 결혼이란 또 다른 세계로 풍덩 뛰어들었다.


전업주부로서, 세 아이 엄마로서, 외며느리로서 살았던 긴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지금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40대 중반 이후 그동안 쌓여온 상처들이 더 이상은 버텨낼 수 없을 만큼 과부하 걸렸을 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심리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2년 7개월의 심리상담을 통해 난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되고 오래 묵혀온 상처들을 하나둘씩 치유해나갔다. 

결국은 그런 심리상담의 매력에 빠져 상담대학원 진학을 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한 선택 중 두 번째로 잘한 선택이었다.


결혼 전 일을 한 거라곤 고작 1년!

결혼을 하며 그나마도 그만두었으니 20년 이상을 전업주부로 산 셈이다.


40대 초반 언젠가 엄마를 따라 모임에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서로 명함을 교환하며 인사하는 일하는 여성들의 모습에 난 혼자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도 저렇게 명함이 있었으면...'

그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여성 편집장, 여성 CEO, 여성 광고회사 대표..

자기소개를 돌아가면서 하는데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뭐라고 말해야 할지

불안, 초조, 긴장의 순간이었다.

결국 자기소개 시간에 전업주부라고 말하면서 짧게 얼버무렸던 기억이 난다.


대학원을 마치고 심리상담사 자격증을 따고 난 당장이라도 일을 할 수 있을 거란 기세로 여기저기 이력서를 보냈다.


하지만 40~50군데를 지원했으나 감감무소식이었다.

내 부풀었던 마음은 점점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그러들었다.


같이 수련받았던 선생님들은 하나, 둘 취직이 되었고 나만 남으니 소외감과 서글픔, 우울함에 난 차즘 어두워져 갔다.

무기력하게 누워있으면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하나님 저에게 한 명이라도 좋으니 내담자를 보내주세요.

상담사를 시키셨으면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셔야죠' 라며 원망 어린 기도도 했다.


나중에 지나서 보니 그 기간은 하나님께서 날 낮추시기 위한 '힘 빼는 시간'이었음이 깨달아졌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용하시기 전에 꼭 힘 빼는 시간을 갖게 하신다고...


바로 취직이 돼서 상담을 했다면 엄청나게 힘이 들어가서 교만했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계속 지원했다.


그런 나를 보며 친한 대학원 동기 샘이

"언니는 잡초 같아.."

"그래 난 잡초다!!"

오히려 그 말이 내 마음에 근성을 자극했다.

'오케이 난 잡초다. 될 때까지 해보는 거닷!!'


그런 고통의 시간이 지난 후

너무 가고 싶었던 정신과에서 연락이 왔다.

면접을 보러 오라고..

그곳은 상담사 자격증을 따고 처음 지원했던 곳인데 2년 만에 다시 가게 되다니!!


면접날 1시쯤 변호사에게 문자가 왔다.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2시간 후에 면접시간이었다.

이런 우연의 일치가~~


면접을 하다가 센터장님이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시 지도 않는데 왜 굳이 일자리를 찾으시는 거예요?"

"저 오늘 이혼했거든요.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해요"

안 그래도 큰 센터장님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더 커졌다.

지금도 센터장님의 놀란 표정이 기억에 생생하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네 전 괜찮아요"


아무튼 그날 면접 결과는 합격이었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하나의 문이 열린다고 했던가?

27년 경단녀가 이제 떳떳하게 명함을 가진 정신과 부설 센터의 심리치료사가 된 것이다.


정신과 원장님이 나에게 했던 말.

"정민유선생님은 경력단절녀의 표본이에요"


그렇게 나의 제3의 인생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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