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0세 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리셨다

아빠에 대한 큰딸의 고백

by 정민유


"네가 자식들 중 최고다"


지난 주말 부모님 댁에 가기 전 무슨 음식이 드시고 싶은지 전화를 드렸다.

회를 사 갈까? 해장국을 사 갈까? 남편과 고민을 하다가 그냥 전화해서 여쭤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전화를 했는데 엄마의 대답은 역시나 족발이었다.

"알겠어요 그렇게 족발이 좋으슈? 내일 사 가지고 갈게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찰나에 아빠가 갑자기 전화를 바꾸셨다.


그러더니 갑자기

"민유야 아빠는 네가 최고다"

자식 중에 내가 최고라고 하시는 거다.

최근에 맛있는 음식을 사서 자주 가니까 그러시는가 보다..라고만 생각했다.

그래도 결혼 이후 계속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남동생이 더 효자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에요 준호가 최고죠".라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그게 아니라.. 하면서 내가 최고라고 하신 이유를 설명하셨다.



"너는 나이가 들어도 계속 뭔가를 배우고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좋은 거야.. 그리고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상담해준다는 게 얼마나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이니.."

"그런 면에서 제가 제일 아빠를 닮았네요"

"그렇지 아빠는 지금도 신문에 줄을 그으면서 읽고 좋은 사설은 스크랩하고 항상 새로운 세상에 대해 공부하는 거 알지?"

"알아요 아빠는 참 대단하신 거죠 그 연세에 그렇게 공부를 계속하시는 분은 흔치 않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널 최고라고 하는 거다"


그 말씀을 듣고 생각해보니 네 남매 중 그런 면에서는 내가 제일 낫다고 인정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칭찬을 들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릴 때는 별로 칭찬을 해주시 않았었는데..

오히려 너무 엄하고 무서워서 아빠 앞에만 가면 혼날까 봐 가슴을 졸이던 아이였다.

훌륭한 아버지에게 어울리지 않는 좀 모자라고 미숙한 딸이라고 느끼며 살았었다.

그런데 아빠가 속으로는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니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아빠의 그런 유전자를 큰딸인 내가 가장 많이 물려받았구나..




지금도 친정에 가면 아빠는 항상 서재에서 뭔가를 쓰고 계신다. 그리고 최근 세계 정세나 경제에 관한 책을 읽으신다. 그리고 그렇게 습득하신 새로운 지식을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정확히 기억하신다. 그런 아빠의 모습은 존경스럽다.



' 맞아 난 성장하고 성숙해지고 싶은 욕구가 많은 사람이지.. 그래서 새로운 걸 배우는 것을 좋아하고 공부는 평생 하는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그래서 40대 중반 이후에 상담대학원에 들어가고 박사 논문은 못썼지만 박사 수료도 하고 늦은 나이에 심리상담사의 삶을 살고 있구나'


그런 나 자신이 뿌듯하게 느껴지면서 나의 그런 면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부모의 칭찬은 파급효과가 정말 것 같다. 특히나 어린 시절의 부모의 칭찬은 아이에게 절대적이다.

그날 잠깐의 아빠와의 통화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고 한동안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듯 기쁨이 충만해졌다.


사실 2년 전 나의 재혼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남편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셔서 아빠에 대한 감정이 좋진 않았다.

딸이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기를 무조건 축복해주시면 안 되는 건가?

그리고 한번 말씀을 시작하시면 끝없이 이어지기 때문에 그날도 엄마랑만 통화하고 끊으려고 했던 건데...

괜히 죄송한 마음도 들었다.




다음 날 아침부터 부모님 댁에 가려고 설레는 마음에 남편과 그날의 스케줄을 의논하고 있는데 남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빠가 코로나 확진이 되셨다는..

작년부터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셔서 그렇게 조심을 하셨건만 결국에 확진이 되신 거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견뎌내실 수 있으시려나.. 마음이 무거워졌다.


증상이 심하시진 않다고 했지만 연세가 있으셔서 불안했다. 가보지도 못하고 계속 기도만 하며 있었는데 어제 아침 또 남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아빠가 숨 쉬기를 힘들어하신다고.

그때부터는 마음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작년에도 폐에 물이 차셔서 호흡이 힘드시고 죽을 고비를 넘기셨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인들에게 기도 부탁을 하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종일 마음속 깊은 곳에 불안함이 묵직하게 깔려있었다.

결국 저녁때 구급차를 타고 중증 병동으로 떠나셨다고 했다. 조금 나아지셔서 안 가시고 싶어 하셨는데 그래도 가시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설득해서 가셨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하루 종일 참았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혼자서 구급차를 타고 가시는 아빠 마음이 어떠실지...


엄마에게 전화를 거니 엄마도 울먹거리시며

"요즘 아빠 얼굴 보면 너무 늙으셔서 불쌍해"

평생 아빠를 존경하고 사랑하며 사신 엄마에게 아빠는 큰 산 같은 존재였다.

강하고 당당하시던 분이 노쇠하고 기운이 없어지시면 상대적으로 더 안쓰러운 것 같다.


하지만 17살의 나이로 이북에서 혼자 월남하실 때

죽을 고비를 수도 없이 넘기셨던 아빠셨다.

하물며 아빠가 묻힐 무덤을 파다가 미군 병사가 아빠 가방 속에 있는 링컨 위인전을 보고 몰래 도망가라고 해서 살아나신 적도 있다고 했다.

이남에 와서 고아처럼 머슴살이부터 시작하셔서 자동차 수리공, 다방 청소부등 갖은 고생을 하시면서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어렵게 졸업하셨다. 그 이후 사회교육 분야에서 많은 일들을 하시고 강의도 하시며 많은 분들에게 추앙을 받는 분이 되셨다.

워낙 열심히 성실하게 사시니 주위에 돕는 손길도 많으셨겠지만 하나님께서 아빠를 지켜주셨다고 믿는다.



자수성가하신 분들의 특성이 고집도 세고 자신의 힘으로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다.

아빠도 그러셨었다. 아빠가 세상의 중심인 것처럼 생각하시는 부분이 많고 항상 자신이 옳다고 느끼셨다. 그런 아빠의 완고함과 교만함이 자식 입장에서 결코 좋지는 않았다. 아빠를 존경하는 분들은 저렇게 훌륭한 아빠가 계셔서 얼마나 행복하냐고 했지만 난 굳이 훌륭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따뜻하고 평범한 아빠를 원했던 것 같다.


특히 나의 자율성을 통제하는 부분 때문에 너무 힘들었고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서클활동도, 기타 연주회도, 친구들과의 여행도 할 수 없는 대학생활을 보냈다. 심지어는 해지기 전에 집에 들어가야 해서 항상 쫓기듯이 살았다.

아빠의 과보호하는 사랑이 감옥같이 느껴졌었다.

그래서 도망치듯이 아빠가 좋다는 사람과 빨리 결혼을 했었으리라.




40대가 되면서 아빠에게 처음으로 반항을 하며 그동안 눌러왔던 분노가 폭발을 했다.

내 삶인데 내 마음대로 살지 못했다는 억울함이 올라왔다.

아빠 때문에 누리지 못한 나의 청춘에 여한을 느끼며 마음속 깊이 아빠를 미워했다.

미워할 만큼 미워하니 아빠의 마음이 느껴지는 순간이 왔다.


'갖은 고생을 하시며 험하게 세상을 사셨기에 딸은 온실 속 화초처럼 곱게 키우고 싶으셨던 거구나..

분명 건강하지 않은 사랑이었지만 아빠로서는 그런 사랑밖에 할 줄 몰랐겠구나'

부모를 이상화했던 내가 미숙한 한 인간으로서의 아빠를 이해하게 된 순간이다.

아빠는 나름대로 사랑을 주셨던 거다.



특히 얼마 전 아빠가

"네가 처음 태어났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아니?

나에게도 자식이란 존재가 생겼다니!! 내가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17살부터 부모를 떠나 혼자 사셨던 아빠가 33살에 처음으로 피붙이가 태어났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우셨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동안의 모든 원망과 분노가 다 사라짐을 느꼈다.

사실 무섭기만 한 아빠에게 제대로 애교 한번 떨어 본 적 없고 안부전화도 거의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다정한 모녀 사이를 보면 너무 부러웠었다.


하지만 부모, 자식관계란 그런 건가 보다.

이제는 나이 들어 힘없어진 아빠가 한없이 안쓰러워 보일 때가 많다.

지난번 제대로 걷기도 힘들어하시는 아빠를 부축한 적이 있는데 몸이 앙상하게 마르신 걸 보고 마음 한편이 훅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젠 힘 없어진 아빠를 내가 챙겨야 할 때가 온 거다.



좀 전에 입원하신 아빠께 전화를 했다.

"아빠 좀 어떠세요?"

"응 아빠 한결 좋아졌다. 여기 병원이 새로 지어서 아주 깨끗하고 좋다"

쩌렁쩌렁한 아빠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쉬기도 훨씬 편안해지셨다고..

우리 아빠 살아나셨네!!! 할렐루야~~

역시 코로나 바이러스 따위가 아빠를 무너뜨릴 수 없지.

더 나이 들어가는 아빠의 모습을 본다는 게 힘들고 가슴 아플 테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더 우리 곁에 계셔주시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제라도 아빠와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어서, 더 늦지 않고 그 사랑을 깨달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 더 사랑할 수 있기를..

더 표현할 수 있기를..

더 웃을 수 있기를., '

아빠가 가장 사랑하는 큰딸이 온 마음 다해 기도해본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브런치 작가 된 지 4개월 되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