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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Feb 24. 2022

서른아홉을 닮은 꽃

작약

  사람들은 나이에 관심이 많다. 그리고 특정 그룹으로 나에 대해 정의하는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20대, 30대, 40대…. 이렇게 연령대로 나를 구분 짓고, 나이의 앞자리가 바뀔 즈음이 되면 불안해하고 아쉬워한다. 연령대가 바뀌기 전에 해야 할 지금 나이대의 숙제. 그런 것이 있다고 생각하다 보니 각 연령대의 후반부가 되면 더 열심히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보통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드라마 <서른, 아홉>이 요즘 인기를 끌고 있다. 드라마를 본 많은 사람들이 40대가 되기 전에 내가 마무리 지어야 할 과제는 무엇인지 떠올려보고, 이미 40대가 된 사람들은 자신의 30대 후반을 떠올려보곤 한다. 나 역시 이 드라마를 보며 나의 서른아홉을 회상했다.


  30대의 나는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워킹맘이었다. 서른이 되자마자 출산을 한 뒤, 몇 달 쉬지 못하고 바로 복직했다. 일과 육아를 모두 빈틈없이 하고 싶은 욕심에 낮에는 업무에 집중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달려가 아이를 돌봤다. 밤낮으로 투잡을 뛰며 진정한 퇴근이 없는 생활을 이어갔다. 아이가 열나고 아픈 날은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다. 그러고도 다음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출근 준비를 하고 무거운 마음을 끌어안은 채 회사로 향했다. 어디에서 그렇게 초인적인 힘이 솟아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30대의 나는 단단하게 내 삶의 벽돌을 한 장씩 쌓아 올렸다.


  내가 돌봐야 할 대상이 있다는 책임감과 긴장감으로 열심히 살아가다 보니 어느덧 30대 후반이 되었다. 이제 내 생활은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것 같았다. 아이는 제법 커서 엄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할 줄 아는 것들이 많아졌다.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나니 경제적인 부담감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게 됐다. 남들이 보기에는 크게 부족함 없는 삶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하지 못한 큰 숙제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나는 항상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바로 아이와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의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고 나면 화장하고 예쁘게 차려입은 엄마의 모습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는 반대였다. 아이는 초등학생이 되어 이제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알만한 나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마의 화장 안 한 얼굴이 예쁘다고 했다. 딸아이는 엄마가 가진 옷 중에 잠옷이 엄마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말했다. 꾸밈없는 내 모습을 사랑해주는 아이의 말에 나는 기분이 좋아 웃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아이한테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은 저녁에 화장을 지우고 잠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전부였다. 아침마다 곱게 화장하고 깔끔하게 다리미질한 옷을 입은 엄마는 아이를 등지고 회사로 가버렸다. 그 모습은 아이한테 가장 못생긴 엄마의 모습으로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게 미쳐 채워주지 못한 엄마와의 시간을 보충해줘야 할 것 같았다. 아이가 더 커서 자기 방문을 닫고 혼자만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기 전에 아이와 추억을 다양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서른여덟이 되던 해에 나는 13년 동안 다닌 첫 직장에 사표를 냈다. 퇴사 후의 삶은 아주 소박했지만 행복했다. 비 오는 날 아이 학교 앞에서 우산 들고 서있는 엄마, 날씨가 포근한 오후에는 함께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오는 엄마, 허기진 오후 시간에는 호떡 믹스를 뜯어 호떡을 만들어주는 엄마.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수도 없이 그렸던 엄마의 모습이 현실 속의 내 모습이 되었다. 우리의 일상은 빈틈없이 행복으로 채워졌다.


  서른아홉이 된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도서관 행사가 있던 날이라 아이는 한 손에 풍선을 받아 들고 다른 한 손은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예전에 같이 일하다 다른 회사로 이직한 선배의 전화였다. 선배네 회사에 채용 공고가 떴는데 채용 포지션이 내가 일했던 커리어와 잘 맞을 것 같다고 했다. 선배는 내게 재취업 생각이 있으면 한번 지원해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통화를 마치고 난 뒤 며칠간 내 머릿속에서는 소란스러운 말다툼이 벌어졌다. 커리어 우먼을 꿈꾸는 경단녀 엄마와 현모양처를 꿈꾸는 전업주부 엄마의 대결은 좀처럼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공정하게 심사를 해줄 심판이 필요할 것 같았다. 가족들과 친한 친구들에게 고민을 털어놨다. 대답은 모두 한결같았다. ‘조금이라도 고민이 된다면 일단 Go’ 이게 모두의 의견이었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에 미련이 남아있지 않았다면 선배의 전화를 받고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내 안에는 미련 조각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재취업의 기회가 왔으면 무조건 그 기회를 잡고 봐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큰 이유가 또 하나 있었다.


  “나이 앞에 4자 붙으면 그때부터는 재취업이나 이직은 하고 싶어도 못해.”


  사람들의 이 말에 회사원으로서 내가 경력을 이어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게 남들과 차별화될 수 있을만한 특별한 재능과 경력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회사원으로서의 이력이 내가 가진 커리어의 전부였다. 아이한테는 미안했지만 나는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나의 재취업 기회를 꼭 잡고 싶어졌다. 부랴부랴 컴퓨터를 켜고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아직 지원 마감일이 지나지 않았다. 면접에 붙은 것도 아니면서 혼자 김칫국 마시는 시간을 왜 그리 오래 보냈나 싶었다. 면접 보던 날, 오랜만에 셔츠와 재킷을 꺼내 입고 길을 나섰다. 1년 만이지만 그 느낌이 많이 낯설지 않았다. 39살에 보는 경력직 면접이라 긴장되지 않을 거라 예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30분 남짓 진행된 면접 시간 동안 누가 내 위장을 갈퀴로 이리저리 긁은 것 같았다. 면접장 문을 닫고 나오는데 속이 쓰라릴 만큼 아픈 것을 보니 다시 직장에 나가고 싶은 마음에 나는 짧은 시간 동안 꽤 많이 애태웠나 보다. 운 좋게도 결과는 합격이었고, 아이의 새 학기 등교와 함께 나는 새직장에 출근을 하게 됐다.


  전 직장에서 해왔던 업무 경험과 노하우를 잘 살리면 새 직장에서의 업무 수행은 크게 힘들이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자신 있게 재취업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이 짧았다. 지나온 세월 일하며 쌓아온 경험이 많은 만큼 업무 시간에 고민할 가짓수도 많았다. 하나를 건드리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다른 업무단에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업무 기준을 변경할 때는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시도라는 명목으로 다양한 도전을 과감히 실행해야 할 때도 있지만, 그때도 내 업무 분야만 살피지 않고 두루두루 꼼꼼하게 챙겨야 하는 게 중간 관리자의 역할이었다. 집에서나 직장에서나 내가 돌봐야 할 것들이 참 많았다. 이렇게 서른아홉의 나는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 무던히 애쓰면서 동시에 고민하고 머뭇거리는 시간도 참 길었다.


  드라마 <서른, 아홉>의 남녀 주인공은 30대 후반이다. 이 둘은 첫 만남부터 서로 호감을 느끼게 되고,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작약이라는 꽃을 매개로 더 깊은 관계가 된다. 이제 고작 두세 번 마주쳤을 뿐인데, 우리 집에 작약을 보러 가자는 말을 덥석 꺼내는 남자. 그리고 당혹스러움에 망설이다가 결국 그 작약을 보러 가는 여자. 마음의 소리를 따라가 놓고 돌이켜보니 본인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는지 여주인공은 이런 말을 한다.


  “작약의 꽃말이 뭔지 알아요?

    수줍음!

    오늘 모습이랑 너무 안 어울려.”


  그렇다. 작약의 개화 과정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작약의 꽃말에 공감할 수 있다.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게 열 손가락을 모두 꽉 쥐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서서히 손바닥을 펼치는 모습처럼, 작약은 그렇게 피어난다. 혹자는 작약의 꽃말처럼 수줍어서 그렇다고 말할 것이고, 혹자는 조심성이 많아서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다. 30대 후반의 나이에는 조심성이 많아서 고민하고 머뭇거리고 마음이 흔들리는 게 아닐까 싶다. 살아온 나이의 수만큼이나 내 선택에 책임져야 할 무게감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동안 맺어온 관계의 수만큼이나 관심 갖고 지켜야 할 역할이 많아졌다. 그래서 선뜻 내 눈앞에 다가온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 또는 무언가를 두고도 쉽사리 마음을 활짝 열고 다가가기가 힘들다. 작은 결정 하나에도 수없이 고민하고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결심한 만큼 그 결정에 최선을 다해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활짝 피어난 작약에서 풍기는 꽃향기처럼 진하고 고급스럽다.


  모두의 서른아홉이 작약처럼 아름답고 향기로웠으면 좋겠다. 때로는 양 어깨의 무거운 짐을 내려두고 앞만 보며 빨리 내달리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사방을 살피며 천천히 내딛는 그 걸음들이 모여 어느 날 향기로운 꽃밭에 닿아있을 것이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이 오늘을 또 살아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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