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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Jan 28. 2022

독보적인 한송이 꽃보다는 꽃밭의 일원이 되고 싶은 이유

수선화

  나는 참 고지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예쁜 꽃을 보면 그 모습에 반해 한걸음 가까이 다가서다가도, 그 꽃이 가지고 있는 꽃말이 긍정적이지 않으면 뒷걸음질 치며 거리감을 둔다. 수선화가 내게는 그런 꽃이었다. 튤립, 수선화, 카라와 같은 구근 식물은 줄기가 곧고 싱싱한 데다가 화형 또한 뚜렷한 자기 모습을 드러내곤 해서 참 예쁘다. 구근에서 피어나는 꽃이 자아내는 싱그러운 이미지는 많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한다. 그런 이유에서 수선화도 참 매력적인 꽃이다. 특히나 하얀 별 모양 꽃잎 가운데 노란 나팔이 매달린 듯한 수선화는 내게 뭐라고 비밀 이야기라도 속삭여줄 것처럼 생겨서 신비롭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배경을 두고 있는 수선화의 기원을 알고 나면 무조건 예쁘다고 수선화를 품에 안기보다는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잠시 생각해보게 된다.


  잘생긴 미소년 나르키소스는 많은 여성들에게 사랑을 받았지만, 자존심이 강한 그는 모든 여자들을 박대했다. 그중 한 여인이 복수심에 하늘에 대고 나르키소스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지게 하되, 절대 그 사랑을 이룰 수 없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를 들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는 나르키소스가 자기 자신과의 사랑에 빠지도록 저주를 내렸다. 이후로 나르키소스는 자아도취 상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숲 속의 샘물에 비친 자신을 모습만 바라보며 사랑에 빠진 그는 스스로를 향한 사랑의 불길에 타들어가다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그의 시신이 누워있던 자리에는 시신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그 꽃이 바로 ‘나르키소스’라는 이름을 가진 수선화다. 자기 자신에게 지나치게 애착한 나머지 성격적 결함 증상을 보이는 경우에 종종 쓰이는 나르시시즘이라는 말도 나르키소스의 이름에서 나왔다. 이러니 수선화가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에 신비로운 향을 내뿜는 꽃이라지만 선뜻 맘에 들어하기는 힘들다. 마치 대책 없는 왕자병에 걸린 청년을 두둔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나르키소스의 안타까운 사연 때문에 수선화의 꽃말은 ‘자기 사랑, 자존심, 고결, 신비’이다. 꽃말만 떼고 보면 딱히 부정적일 것도 없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인간의 기본적인 마음이고, 내가 가장 아끼는 나 자신을 갈고닦기 위해 애쓰는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난 꽤 괜찮은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까. 그렇게 괜찮은 사람들이 여럿 모여 있으면 그 사회는 멋지지 않을까? 다만 그 사랑의 방향을 오로지 스스로에게만 향하게 하지 않고, 종종 주변을 향해 각도를 조금씩 돌려본다면 더 살만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어느 날 혼자 해보게 됐다. 그러다 지난봄 공원에서 물가에 핀 수선화 꽃밭을 보는 순간, ‘그래! 바로 저거지.’ 하며 난 무릎을 치게 되었다. 수선화에 대한 나의 오해와 편견이 드디어 풀리다니….


  연못가에 외롭게 피어있는 한 송이의 꽃을 보면 자태가 아무리 독보적으로 아름답다 하더라도 보는 이의 마음이 그다지 즐겁지 않다. 하지만 수많은 꽃송이가 한데 모여 꽃밭을 이루고 있으면 바라보는 이의 마음이 벅차오르다 못해 황홀해지기까지 한다. 나는 무언가 목표한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 혼자 하기보다는 같은 목표를 가진 온라인 그룹에 참여하는 편을 선호한다. 스스로 꾸준히 실행할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지만, 나는 강제적으로 나를 묶어두는 시스템이 없으면 도무지 뭘 하지 않는다. 이런 나 자신이 참 부끄럽고 한심해 보이는 시기도 있었다. 아이한테는 자기 주도적 학습을 해야 한다고 늘 잔소리하면서, 정작 어른인 나는 인증 시스템이 없으면 작은 것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기분이 씁쓸했다. 하지만 공원에 함께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수선화 꽃밭을 보면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수선화를 바라보는 시선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나는 외부적 통제나 감시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어서 남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 같다. 내 성격이 이렇다 보니 마감 기한 안에 숙제를 제출해야 하고 정기적으로 시험을 봐야 하는 학교 생활에 곧잘 적응했다. 회사 생활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달 월말이면 다음 달 업무 계획을 수립해서 보고하고, 월초부터 부지런히 계획한 일들을 실행했다. 그리고 또 월말이 다가오면 마감보고와 함께 다음 달 업무 계획을 했다. 이렇게 12번을 반복하면 한 해가 꽉 들어찼다. 통제 상황 하에서 내게 부여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늘 평균 이상은 해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직장의 굴레를 벗어나 스스로 루틴을 만들어 철저하게 자기 관리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혼자서 달리기 힘들다면 나와 목표점이 같은 사람과 서로의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주며 함께 달리면 된다. 그렇게 달리다 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아름다운 꽃밭을 만들어 그 곁을 지나가는 이들에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할 수 있지 않을까?


  벌써 새해의 첫 달이 거의 다 흘러갔다. 연초에 야심 찬 마음으로 만들었던 2022년 나의 드림보드를 펼쳐봤다. 계획 대비 실행 정도를 살펴보니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활동 결과를 인증하기로 한 일들은 매주마다 정해진 분량에 맞춰 잘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나 혼자 하기로 맘먹은 일은 연초에 작심삼일의 대표 사례를 보여준 뒤 흐지부지 끝내버렸거나, 아직 시작조차 하지 않고 있다. 함께하는 힘은 이렇게나 대단하다. 남은 11개월을 후회 없이 알차게 보내기 위해 나와 함께 근사한 꽃밭을 만들 사람들을 찾아야겠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이뤄낼 수선화 꽃밭의 노란 물결을 상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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