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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Mar 17. 2022

다시 귓가에 즐거운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샌더소니아

  앞에 두고 있으면 눈과 코가 즐거워지는 것은 물론이고, 귀까지 행복해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꽃이 있다. 바로 샌더소니아다. 작은 종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 같은 모양이라 그런지 바람이라도 살랑 불면 예쁜 종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어떤 날은 노란 종모양 등불이 내 마음을 환하게 비춰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사람의 마음을 밝고 부드럽게 만들어주는 이 꽃은 사계절 내내 보고 싶은 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샌더소니아는 여름이나 가을에만 잠깐 유통되는 꽃이다. 아직 샌더소니아를 만나보려면 몇 달 더 기다려야 하지만, 요즘 내 눈과 귀에는 이 꽃만큼이나 즐거움을 선사해주는 것이 있다. 뮤지컬 공연이다.


  뮤지컬은 신랑과 나에게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우리는 많은 뮤지컬을 함께 본 커플이었다. 입사 동기로 만난 우리 둘은 신입사원 연수가 끝난 뒤 옆 부서에 나란히 배치되었다. 집 방향이 같아서 퇴근길 종종 같이 지하철을 타고 가긴 했지만 우리 집 앞 역에서 내가 먼저 내리면 그거로 그만이었다. 신랑이 술한자 하자는 말을 가끔 하곤 했지만 술은 회식자리에서 마지못해 먹는 게 전부였던 나는 피곤하다며 집으로 가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은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를 같이 보러 가자는 말을 꺼냈다. 대학교 때 친구와 함께 그 공연을 보면서 프랑스 뮤지컬의 화려하고 웅장한 볼거리에 흠뻑 빠져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다시 한번 같은 공연을 보고 싶었다. 나는 흔쾌히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겨울과 봄 사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에서 우리의 첫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알고 보니 뮤덕(뮤지컬 덕후)이었다. 유명한 대극장 공연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잘 모르는 소극장 공연까지 안 본 뮤지컬이 없을 만큼 엄청난 뮤지컬 마니아였다. 남편이 공연계의 소식을 빠르게 접하고 공연마다 좋은 자리 티켓을 확보해왔다. 그 덕분에 나는 국내에서 막을 올리는 유명한 공연들을 도장깨기 하듯 하나씩 관람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이 없어도 가볍게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뮤지컬 공연이 나는 참 좋았다. 음악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는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강조되어 왔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보면 제우스는 세상의 많은 일들을 시와 노래로 기억되게 하려고 아홉 명의 뮤즈를 만들었다. 뮤즈들은 신화 속에서 중요한 순간에 음악으로 은근한 도움을 주곤 했다. 강압하지 않고 부드럽게 사람들을 이끄는 넛지(nudge) 마케팅의 달인들 같다고나 할까? 또한 동양 고전 <소학>에서는 인간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음악으로 인격이나 학문을 완성시킬 것을 권유했다. 이처럼 음악이 사람의 마음을 녹여내는 힘이 있어서 그런지 티브이를 보면 객석에서 음악을 듣다 말고 눈물을 흘리는 관객을 볼 수 있다. 가사가 없는 선율만으로도 그 음악이 전달해주는 감정에 깊이 빠져드는 사람들이 난 신기했다. 나는 감수성과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이라 그런지, 그냥 음악만 듣기보다는 무대 연출,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까지 눈앞에서 펼쳐지는 종합예술이 이해하기 쉬워서 좋았다. 연애 초기부터 이렇게 뮤지컬의 매력을 조금씩 알아가던 나는 신혼 때까지 남편과 함께 자주 뮤지컬 극장을 찾았다.


  대부분의 가정이 그렇듯 아이가 생기면서 부부의 취미 생활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 부부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랑스러운 딸을 선물 받은 대신 우리는 공연장으로부터 멀어진 채 10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다. 아이가 어릴 때는 굳이 공연장을 찾지 않아도 우리 집 안방극장에서 펼쳐지는 아이의 갖은 재롱잔치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 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가족들은 각자의 세계로 들어가 버렸다. 개인의 핸드폰 속에서 저마다의 취향에 특화된 콘텐츠만 보면서 지내다 보니 남편과 나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종종 들었다. 공통 관심사가 사라지다 보니 부부의 대화는 점점 단조로워졌다. 계속 이렇게 지내다 보면 그냥 한 지붕 아래에서 공간만 공유하는 룸메이트 정도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했다.


  지난달 갑자기 나는 신랑에게 등 떠밀려 뮤지컬 극장에 가게 됐다. 내게 꼭 보여주고 싶은 공연이 있다면서 티켓 예매를 미리 해두었다는 것이다. 공연 관람이야 반갑지만 티켓을 한 장만 들고 혼자 가야 하는 게 썩 달갑지는 않았다. 늦은 시간 아이를 혼자 두고 나갈 만큼 우리 딸이 다 큰 게 아니다. 물론 아이가 공연장에 입장 가능한 나이지만, 아이가 흥미도 없는 공연에 부모의 욕심 때문에 억지로 끌려가 앉아있게 하고 싶지 않다. 주변 친구들에게 공연을 함께 보러 가자는 말을 꺼내기도 쉽지 않다. 모두 아이를 키우느라 시간 내기가 힘든 것을 물론이고 코로나로 만남이 조심스러운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부에게는 혼자 공연을 관람하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얼마 전부터 남편은 <썸씽 로튼>이라는 뮤지컬이 궁금해서 OST를 반복해서 듣고, 유튜브에서 공연의 주요 장면을 찾아봤다고 한다. 이 공연은 꼭 극장에서 라이브로 보고 싶다며 남편이 먼저 공연장을 다녀왔다. 공연을 보고 돌아온 남편의 얼굴에는 흥분과 행복함이 가득했다. 이 기분을 아내에게도 꼭 느끼게 해주고 싶었는지 그날 밤 신랑은 나를 위해 티켓 예매를 해두었다고 했다.


  내가 혼자 공연을 보러 가야 하는 날, 나는 이름도 잘 모르던 공연이라서 별 기대감 없이 집을 나섰다. <썸씽 로튼>이라는 공연은 르네상스 시기, 당대 최고의 천재 작가 셰익스피어와 문 닫을 위기에 놓인 영세한 극단 주인 닉 바텀의 이야기다. 이 작품 안에서 셰익스피어가 창작의 고통에 힘들어하다가 남의 작품을 훔치려 모략을 꾸민다. 진짜 셰익스피어가 알면 크게 노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만한 스토리다. 딱 봐도 말이 안 되는 발칙한 상상을 담은 비급 감성의 코미디가 예상되었다. 그래서 내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막이 오르고 ‘웰컴 투 더 르네상스’라는 오프닝 곡과 함께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는 순간, 나는 배우들을 따라 1500년대 후반의 르네상스 시대로 빨려 들어갔다.


  <썸씽 로튼>은 공연의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누구나 즐겁게 마음껏 웃을 수 있는 힐링극이었다. 배우들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배꼽을 잡고 웃다가 현란한 탭댄스 장면에 감탄하고 흥겨운 리듬에 어깨를 들썩이게 됐다. 이 뮤지컬의 유명 넘버인 <A Musical>에서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우울한 기분 날려버릴 뮤지컬’, ‘부담 없고 재미있고 유쾌한 걸 봐야지’. 그렇다. <썸씽 로튼>은 뮤지컬을 처음 보는 사람한테도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재미있고 유쾌한 극이었다. 그러나 마냥 가벼운 코미디만은 아니었다. 이 작품 안에는 유럽의 다양한 역사적 배경과 현시점의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봐야 할 메시지가 담겨있었다. 르네상스 시대 새로운 문화 부흥이 일어나는 풍경, 여성 인권이 억압받던 시대 이를 개척하기 위해 애쓰는 능독적인 여성의 노력, 아무리 노력해도 넘사벽 천재를 이길 수 없어 괴로워하는 범인의 고충,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고군분투하는 가장의 안타까운 현실 등….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속의 모습과 오늘날 우리의 현실 모습이 곳곳에 잘 녹아들어 가 있었다. 또한 진정성을 담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동생 나이젤 바텀과 생계를 위해 무조건 흥행을 보장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하는 형 닉 바텀, 이 둘 사이의 갈등을 보면서 깊은 생각을 해볼 수 있었다. 누구나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인싸가 되고 싶어 하는 시대. 나는 과연 어떤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할지 잠시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뮤지컬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집으로 들어오는 길에 내 심장은 평소보다 한 뼘쯤 위로 쑥 올라간 것 같이 흥분됐다. 즐거움과 감동이 있는 무대를 보고 난 직후라 그렇기도 했고, 사실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극 안에서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능가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영세 극단 대표인 닉 바텀은 예언가를 찾아갔다. 이 예언가는 미래의 극장에서 흥행할 작품은 연극에 노래를 더한 뮤지컬이라고 알려줬다. 더불어 미래의 인기 뮤지컬 수십 가지를 말해주는데, 안타깝게도 예지력이 떨어지는 이 사람의 예언은 엉성했다. 그는 오페라의 유령, 캣츠, 라이온 킹, 노트르담 드 파리 등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들을 알려주면서 아주 조각조각으로 우스깡스럽게 패러디를 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이 장면은 나를 10여 년 전 남편과 데이트하던 시절로 데려갔다. 뮤지컬 한 편을 볼 때마다 나란히 앉아 같은 감정을 느끼던 순간, 공연이 끝나고 나면 한동안은 OST를 들으며 감상평을 서로 늘어놓던 순간.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집에 돌아온 나에게 남편이 물었다.


  “공연에 나온 뮤지컬 패러디 장면 다 기억나? 오리지널 작품이 뭔지 다 알아볼 수 있었어?”


  남편에게도 같은 대목이 인상 깊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그제야 알게 됐다. 왜 남편이 이 공연은 꼭 봐야 한다고 나를 등 떠밀어 내보냈는지…. 우리는 요즘 틈만 나면 유튜브를 같이 틀어놓고 <썸씽 로튼>의 주요 장면을 리뷰하며 수다 떤다. 서로 다른 날 따로 공연을 봤지만, 마치 객석에 함께 앉아서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10여 년 만에 부부의 공동 취미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우리 집 거실 테이블에는 요즘 매일 즐거운 종소리를 들려주는 샌더소니아가 활짝 피어있는 것 같다. 우리를 연인으로 이어주고, 행복한 추억으로 더 단단하게 엮어주는 감사한 뮤지컬! 나중에 아이가 더 크면 남편과 단둘이 손잡고 뮤지컬 극장을 찾고 싶다. 그때는 공연장에서 마음껏 소리 높여 환호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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