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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May 19. 2022

풍요로움으로 마음을 채우는 시간

보라 유채꽃

  지난주 친한 언니와 단둘이 제주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거의 20년 만에 가족이 아닌 사람과 떠난 여행이었다. 대학 때 이후로는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사회 초년생 때 만난 남편과 나는 둘 다 여행을 꽤나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결혼 전에 남자 친구와 여행을 떠난다는 건 우리 집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여자 동기들이 여자들끼리 여행을 가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비밀 사내 연애를 하던 중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왜 남들한테 숨겨야 할 일인가 싶지만, 아무튼 그때는 특급 비밀이라도 되는 양 꽁꽁 숨기고 지냈다. 하룻밤 이상을 동기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자연스레 사생활 이야기를 털어놓게 될 게 뻔했다. 나는 여행 내내 동기들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거짓말을 만들어내야 하는 상황이 불편하고 싫었다. 아예 그들과의 여행 자체를 피해버리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고 휴가 기간 동안 방에만 틀어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남편과 연애하는 동안 나는 엄마와 여행을 다녔다.


  결혼 후에는 남편과 여행을 다녔고, 아이가 어느 정도 큰 이후로는 아이와 단둘이 여행을 가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사람들, 가족 하고만 줄곧 여행을 다니다 보니 남과의 여행이 나에게는 상상만으로도 굉장히 어색한 일이 되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 밤, 혼자 쓸데없는 걱정을 잠시 했다. 나도 모르는 나의 잠버릇이 튀어나오는 건 아닐까? 밤에 혹시 내가 코를 고는 건 아닐까? 자다 말고 갑자기 가스 분출을 하지는 않을까? 대학 때 친구들이랑 여행 다닐 때는 이런 걱정은 하지도 않았던 것 같은데…. 직장 생활하며 눈칫밥 먹은 세월이 길었던 탓인지, 나도 참 남의 시선을 어지간히 많이 의식한다.


  그렇지만 이런 건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여행은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을 갖기 위한 게 아니었다. 아이 없이 어른들끼리 떠난 여행지에서 나를 위한 시간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바로 이번 여행의 이유였다. 아이를 데리고 여행을 갈 때는 놀이공원을 들리거나 수영장을 가는 게 필수 코스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온전히 나의 취향대로만 여행 코스를 짤 수 있다니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공항으로 향하는 길, 이미 그때부터 내 마음은 제주도 바닷가에 가있었다. 제주 공항 착륙! 아쉽게도 날씨가 흐렸다. 서울 하늘은 파랗던데, 왜 하필 내가 오는 날 제주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낀 건지…. 자타공인 날씨의 요정 둘이 함께 제주에 왔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속상한 마음이 순간 들기도 했지만, 우리는 흐린 하늘을 원망할 틈이 없었다. 우리는 1박 2일 동안 알차게 제주 버킷 리스트를 실행하고 돌아가야 했으니까.


  렌터카를 빌리자마자 바닷가 경치 좋은 밥집을 향해 달렸다. 차창 밖에서 불어오는 바다 내음에 코 끝이 상쾌해졌다. 메뉴판을 펼치고 뭘 먹을까 고민하다가 전복물회와 해물솥밥을 시켰다. 제주에서는 해산물 메뉴지! 까만 현무암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해산물을 먹는 기분이란…. 나의 오감을 만족시키는 제주에서의 첫 식사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이어지는 우리의 여행 콘셉트는 기승전 꽃이었다. 꽃 좋아하는 40대 아주머니 둘이 봄에 여행을 떠났으니, 여행의 팔 할은 꽃구경으로 채울 게 뻔했다. 제주 꽃구경 명소로 유명한 카페와 관광지를 돌아가며 찾았다. 5월 중순, 아직 노지에 수국이 피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다행히 온실에서 예쁘게 핀 수국 화분이 야외에 나와 화사한 경치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향이 없는 수국을 보면서 눈만 즐거우니 좀 아쉽다 싶을 때쯤, 어디선가 진한 꽃향기가 마스크를 뚫고 들어왔다. 5월의 여왕답게 우아한 장미꽃이 만개해서 사방에 고급스러운 향을 퍼트리고 있었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는 건 참 달갑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난 엄마 둘에게 비 오는 제주도는 운치 있고 아름다웠다. 빗물에 꽃잎과 이파리는 더 선명해졌다. 빗방울을 머금고 있는 꽃잎은 청초함 그 자체였다. 제주의 봄꽃을 구경하며 한 손에는 우산을 들고 반대 편 손에는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카메라 버튼을 눌렀다. 옷이 축축해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꽃에 매료되어 시간을 보냈다. 캠핑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우중 캠핑을 즐기려고 비 오는 날 캠핑을 떠난다고들 한다. 나는 캠핑의 매력은 모르지만, 우중 꽃구경의 매력은 이제 확실히 알 것 같다. 자연을 즐기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계절마다 그리고 날씨마다 그 느낌이 어떻게 다른지 다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  




  1박 2일의 일정을 거의 다 마치고 공항으로 돌아가기 전,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보라 유채꽃 명소를 찾았다. 그동안 유채꽃은 노란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보라색도 있다니 궁금했다. 제주의 유채꽃은 참 특별하다. 유채꽃은 우리나라 최남단에서 가장 먼저 봄을 알리듯 피어난다. 밝고 경쾌한 노란 꽃잎들을 보고 있으면 겨울 동안 웅크리고 있던 마음에 활기가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유채꽃이 만들어내는 노란 물결을 보고 있으면 황금물결을 바라보는 것처럼 마음이 든든해지기도 한다. 유채꽃은 꽃이 피고 지면서 씨앗이 땅에 떨어져 이듬해에 또 꽃을 자연적으로 피우는 야생화라고 한다. 이렇게 야생에서 피고 지는 유채꽃이 군락지를 형성하며 갈수록 더 풍성하게 꽃밭을 만들어간다니…. 가히 풍요로움의 상징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겠다. 이렇게 매력적인 유채꽃을 보통 쌀쌀한 봄날에만 볼 수 있는 게 아쉬웠다. 그런데 완연한 봄날에도 유채꽃밭이 만들어내는 풍요로움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반가웠다. 마침 내가 제주를 찾은 5월의 어느 날, 비안개가 자욱한 한라산 중턱에 신비로움이 내려앉은 듯이 보라 유채꽃이 만발했다.




  굵고 짧게 1박 2일의 여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핸드폰 사진첩을 열어봤다. 보라 유채꽃이 제주의 들판을 가득 메운 것처럼 온통 꽃 사진으로 가득 메워진 나의 사진첩! 가족들과 함께 왔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취향이 일치하는 나의 새로운 여행 메이트 덕분에 이틀 동안 나를 위한 시간으로 꽉꽉 채우고 돌아가니 마음이 뿌듯했다. 사진첩에 채워진 꽃 사진 장수만큼이나 내 마음도 풍요로워졌다. 이 여운으로 앞으로 한동안 나는 다정한 엄마, 행복한 아내로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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