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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May 12. 2022

뭐든 하나는 배운다.

그린 소재

    10년 넘게 다니던 첫 직장을 그만두던 날, 후배들에게 생전 잔소리를 하지 않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잔소리 같은 이야기를 했다.


  "회사에서 내가 그동안 했던 일 중에 의미 없는 일은 없더라. 하기 싫고 하찮은 일이라고 여겨졌던 업무를 하면서도 내가 얻게 되는 게 하나는 꼭 있더라고…."


  늘 내 코가 석자이다 보니 후배들의 안타까운 순간을 보면서 오지랖을 부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정든 일터를 떠나면서 애정 하는 후배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하고 와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회사의 업무에 경중이 어디 있냐고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이왕에 고생하는 거 남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해마다 내가 받은 업무 실적 결과에 따라 내년도 급여가 달라지고, 승진 여부가 결정된다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그렇다 보니 보통은 같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다면 더 티가 나고 화려해 보이는 업무를 하고 싶어 한다. 인정 욕구가 강한 내가 그랬고, 후배들 또한 여럿 그랬다.


  사원 시절 내가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은 부서 예산을 관리하는 일이었다. 잘해봤자 본전이고, 제대로 관리를 못하면 그 많던 돈이 다 어디 갔냐는 핀잔이나 듣게 되는 업무였다. 그리고 이 업무가 유난히 더 싫은 이유는 꼭 팀마다 어린 여직원한테 시키는 업무이기 때문이었다. 남녀차별의 상징과도 같은 업무라 하기 싫었던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내가 그 업무를 담당했을 때는 팀에 내가 막내 여직원이 아니었는데 후배를 제쳐두고 나에게 시키는 게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팀장은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나 나름 고급인력이거든? 저 아저씨는 내 학벌을 모르나?' 내 기준에 하찮아 보이는 일을 내게 시키니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학벌주의자의 오만함까지 끓어오르는 날도 많았다.


  나의 본 업무는 데이터 분석에 기반해서 마케팅 실행을 하는 업무였다. 월 중에 분석을 하는 일은 요령껏 스케줄을 조정해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케팅 수행 업무는 늘 월말, 월초를 기점으로 새롭게 진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쯤이면 늘 일에 치여 바쁘게 지냈다. 그 와중에 부서 예산 업무까지 월 기준으로 마감해야 하니 항상 지나온 달을 마감하고 새로운 달을 맞이하는 시점에는 내가 극도로 예민해지는 시기였다. 요즘은 법인카드로 유흥업소를 가는 일은 대다수의 회사가 불가능하지만 나의 사회생활 초기에는 가끔 그런 날도 있었다. 내가 팀원들 밥 먹은 비용 처리하는 것도 모자라서 남직원들끼리 술 먹고 놀은 뒤치다꺼리까지 해줘야 하는 날은 화가 더 치밀어 올랐다. 내가 이러려고 힘든 공부해서 취업했냐며 자괴감이 드는 날이 많았다.


  부서 예산 업무는 나를 분노로 가득 차게 만들 뿐, 나한테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라 여겼다. 이 일만 떼 버릴 수 있으면 나는 내 본 업무에 더 충실해서 더 훌륭한 실적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속 안에 불만을 가득 참고 살면서도 남들 앞에서 그 마음을 표출하는 방법을 몰랐다. 그러다 보니 그 일은 꽤 오랫동안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팀장님이 나를 조용히 따로 불렀다. 보통 사원급의 직원에게 업무 지시를 할 때는 중간 관리자와 함께 부르곤 했는데, 그날은 나만 부르는 게 이상했다. 올 연말 송년회에는 팀원들이 소고기를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해주고 싶으니 거기에 맞춰 부서 예산 관리를 미리 준비하자고 하셨다. 추가 예산을 배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허리띠를 졸라매야 부서 살림을 아낄 수 있을지 나의 고민은 그날부터 시작됐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네 덕에 소고기 잔뜩 먹었다는 소리라도 들어보자는 마음으로 나는 집안 살림하듯 부서 살림살이를 하기 시작했다. 가을부터 알뜰살뜰 고민하고 준비했더니 해를 마감하기 전 우리는 부드러운 한우를 숯불에 구우며 서로의 노고를 칭찬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부서 예산 담당자 업무가 조금씩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일은 단순히 팀원들의 심부름을 하고 뒤처리를 하는 보잘것없는 업무가 아니었다. 팀워크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금전적 자원을 효율적으로 쓸 방법을 궁리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일의 중요도가 다르게 보이니 그 일을 대하는 내 마음도 어느새 달라졌다. 월말이면 예산 시스템을 열어놓고 분노의 타자질을 하던 나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왕이면 같은 돈을 써도 팀원들의 만족도가 올라갈 수 있도록 고민하며 한 해 동안 구멍 내지 않고 팀 예산 관리를 알뜰히 했다. 그 결과 이듬해 연말에는 근사하게 5성급 호텔 뷔페 레스토랑에서 송년회를 하며 다른 팀의 부러움을 받는 일이 생겼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서 12월 31일, 퇴근하는 팀원들 손에 롤케이크를 하나씩 쥐어주기까지 했다. 내 돈 주고 사기는 아깝지만 선물 받으면 기분 좋은 롤케이크를 집에 들고 들어갈 생각에 팀원들의 얼굴이 평소보다도 더 밝아졌다. 퇴근길 환한 팀원들의 미소를 보니 내 마음은 뿌듯함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나의 실생활에 가장 도움이 되는 일이 바로 예산 담당 업무인 것 같다. 아무리 빅데이터가 화두가 되는 세상이라 하지만 전업주부가 되고 보니 데이터 분석 업무는 쓸모가 없어졌다. 하지만 예산을 관리하는 일은 가계 예산 관리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모임에 나가서 총무 역할을 맡을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리고 나중에 창업할 일이 생긴다면, 그때도 분명 도움이 되겠지?


  잘하면 티 나지 않고, 잘못하면 티가 나는 루틴하고 사소해 보이는 일들. 그래서 모두가 피하는 일이다. 이왕이면 아름답게 돋보일 수 있는 일을 택하고 싶은 게 사람의 당연한 마음이다. 하지만 꽃이 아름답고 돋보일 수 있도록 배경이 되어주는 그린 소재의 소중함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알록달록하고 화려한 꽃들만 모여있는 꽃다발은 영 매력이 없다. 사이사이에 눈의 피로를 덜어주고 싱그러움을 더해주는 초록색 이파리들이 있을 때 꽃다발은 더 아름다워진다.


  그룹이 한 방향을 향해 잘 융화되어 나아가길 바란다면 그린 소재와 같이 티 나지 않지만, 없으면 아쉬운 서포터즈 역할을 해주는 멤버들을 꼭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서포터즈를 해야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의 중요도를 스스로 높이 평가했으면 한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일을 대하다 보면, 그 안에서 의도치 않았던 배움을 얻게 될 수도 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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