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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리나 Apr 28. 2022

꽃의 다양성은 존중하면서..

꽃다발

  엄마들이 모여있는 카톡방에서 요즘 자주 대화 소재가 되는 드라마가 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그린 마더스 클럽>이다.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고 있는 학부모라면 드라마 제목을 보고 녹색 어머니회를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녹색 어머니회는 등굣길에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교통 지도를 하는 학부모 단체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초등학생 아이를 키우며 아침에는 돌아가면서 교통 지도를 나가는 엄마들이다. 나도 6년 동안 녹색 어머니회 활동을 해봤는데, 내 순번이 되는 날은 아침부터 꽤 분주하다. 드라마의 1회 시작 장면에서부터 그 분주함이 느껴졌다. 그런데 영상 속의 분위기는 우리 집의 수십 배 이상이었다.


  마치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는 날처럼 한껏 차려입은 엄마는 밥상을 차려두고 아이를 깨운다. 동시에 영어 리스닝을 위해 오디오를 켠다. 아이는 잠이 덜 깬 상태로 눈을 반쯤 감은채 식탁 앞에 앉는다. 다른 한 아이는 식사를 먼저 마치고 화장실에서 이를 닦고 있다. 엄마는 화장실 문을 활짝 열고 아이한테 영어 리스닝을 해야 하니 문 열고 양치하라고 잔소리를 한다. 과연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음원 소리가 아이들의 귀에 들릴까 의문이 드는 순간이다. 아이들의 등교 준비를 다 해주고 엄마는 교통 지도를 위해 먼저 현관문을 나선다. 학교 주변 횡단보도마다 곱게 차려입은 엄마들이 교통안전 깃발을 들고 서있다. 녹색 어머니회 활동이 끝나면 엄마들은 카페에 모여 교육 정보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날은 영재원 합격을 위한 교육 설명회에 다녀오기도 한다. 오후에 아이들이 하교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학원 앞을 오가느라 엄마들은 손에서 운전대를 놓을 틈이 없다. 그 와중에 아이들의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중간중간 틈새 시간에 놀이터나 키즈카페에서 아이들을 뛰어놀게 하는 일도 빼먹지 않는다. 밤이 되면 아이들은 테이블에 앉아 문제집을 풀고, 엄마는 그 옆에서 노트북에 엑셀 프로그램을 열어두고 무언가를 열심히 한다. 바로 아이들의 필독서 목록을 만드는 작업이다. 언제 집안 청소를 다 해두었는지 밤이 되어도 불이 꺼지지 않는 집안은 환한 불빛만큼이나 밝고 깔끔하다.


  드라마를 고작 10여분 봤을 뿐인데, 갑자기 물 없이 고구마를 잔뜩 집어먹은 듯 속이 답답하다.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 대치동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드라마이기 때문에 심하게 과장되어서 그런 걸까? 현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참 안타깝다. 엄마들이 하루 종일 아이한테 열정과 시간을 쏟아붓는 만큼 경제 활동을 위해서 노력한다면 국가 경제 발전에 얼마나 큰 힘이 될지 혼자 생각해봤다. 아이를 잘 키우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인재 육성이 국가 발전의 중요한 기반인데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엄마가 마치 매니저처럼 하루 종일 쫓아다니며 애쓰지 않아도 아이는 충분히 훌륭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관심사를 아이에게 집중하고, 명문대 진학을 위한 필수코스처럼 여겨지는 영재원에 아이를 합격시키는 것을 목표로 매일을 살아가는 엄마들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엄마들을 그런 환경으로 내몬 우리 사회와 교육 제도의 현실이 원망스럽다.


  드라마 속의 엄마들이 아이들의 명문대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이유는 그래야 취업이 잘 되고 성인이 되어서 경제 활동을 안정적으로 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요즘은 기업이 블라인드 면접을 통해서 스펙이 아닌 역량 만으로 직원 채용을 한다고 한다. 나 역시 오랜기간 대기업을 다니면서 신입사원 채용 면접관으로 참여를 한 적이 여러 차례 있다. 진짜로 블라인드 면접이 진행된다. 나는 지원자의 이름, 전공, 자기소개서만 볼 수 있다. 자기소개서에는 출신 지역과 학교가 드러나는 내용을 포함해서는 안 된다. 나를 포함한 면접관들이 지원자들을 평가하는데 고려하는 부분은 크게 2가지이다. 채용하려고 하는 업무 영역에서 지원자가 업무 수행을 할 수 있을만한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와 우리 회사의 기업 문화와 지원자의 성향이 잘 맞는지이다. 이 2가지를 파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이 면접관이 지원자를 판단할 수 있는 전부이다. 하지만 지원자 전원을 대상으로 심층 면접을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사전에 인사팀에서 1차 서류 통과 기준에 따라 지원자들을 필터링할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나는 인사팀에서 일해본 경험이 없어서 서류 통과 기준에 대해서는 모르겠다. 하지만 인사팀에서 마치 경품 추첨하듯이 무작위 추출로 1차 통과자를 뽑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에게 공정성을 위해 직원을 랜덤으로 뽑으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업 목표 달성을 위해 기업은 조금이라도 업무 역량이 더 뛰어난 직원을 채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경기 악화로 취업의 문이 갈수록 좁아져서 면접의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전문직이나 대기업 취업 이외의 다른 길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현실 또한 속상하다. 우리 사회에서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안정적이고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다면 굳이 바늘구멍같이 좁은 길을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될 텐데 말이다.


  물론 드라마 속의 엄마들처럼 상위권만 바라보는 학구열이 높은 엄마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 아이만 학원에 안 보내면 한없이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 때문에 사교육을 시키는 부모가 있다. 그리고 아이가 놀이터에 가도 놀 친구를 만나기 힘들어서 친구들을 만날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학원에 보내는 부모도 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에는 낮 시간 동안 아이를 혼자 둘 수 없어서 불필요한 학원까지 보내면서 아이가 학원에서 시간 때우게 하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가 그랬다. 혼자 있는 걸 무서워하는 외동아이를 키우다 보니, 어떤 때는 아이가 미술이나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고 싶다고 해도 그 시간에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 억지로 계속 학원에 보냈다. 마음 한 켠에는 저러다가 아이가 예술 분야에 질려서 나중에 문화생활의 즐거움을 느끼지 못할까 봐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떻게 될지 모르는 먼 훗날의 여가 생활까지 걱정할 마음의 여유가 내게는 없었다. 당장 오늘을 무사히 살아내야 하는 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왜 초등 아이를 대상으로 한 교육 기관만 많고, 보육 기관은 턱없이 부족한 것일까? 초등 고학년이 되어도 여전히 아이들은 미숙한 부분이 있고 어른의 도움이 필요한데 말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간은 코로나 때문에 그동안 운영되던 몇 안 되는 보육 기관도 마음 편히 보낼 수가 없게 됐고, 학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었던 방과 후 수업도 폐지됐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각자 도생해야 하는 분위기가 더 강해진 것이다.


  아프리카 속담 중에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여기에는 한 아이가 온전하게 성장하는 게 단순히 부모의 책임만이 아니고, 지역 사회 또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이 친구를 만나서 즐겁게 놀 수 있는 공간, 낮에 부모가 집에 없어도 아이가 안전하게 보낼 수 있는 보육 기관이 더 많이 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부모는 직장과 사회에서 내 역할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가족 모두가 안전하고 즐겁게 낮 시간을 보내고 저녁에 집 안에 모여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이상적인 모습은 이야기책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일까?


  꽃다발을 만들 때 한 가지 꽃으로 한 다발을 구성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제각각 다른 모양과 색깔을 가진 꽃들로 만든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다채로운 꽃들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을 좋아하기 때문일 것이다. 꽃을 바라볼 때만 이런 시선을 가질 일이 아니다. 모양과 색깔이 다 달라도 모두 아름다운 꽃인 것처럼, 우리 아이들도 재능과 꿈이 다 달라도 모두 아름다운 사람으로 성장할 게 분명하다. 아이들이 풍성한 꽃다발을 만들 수 있도록 부모와 교사는 아이들의 부족한 공간을 메워주는 작은 필러 플라워* 역할을 해주고, 사회는 그린 소재**가 되어 든든한 베이스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면 참 좋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풍성하고 멋진 꽃다발이 우리 모두의 품에 기쁜 선물로 안겨질 날을 꿈꿔본다.



* 필러 플라워 : 영어로 채우다(fill)에서 온 말로 중심 꽃이 되는 화형이 큰 꽃과 꽃 사이의 공간을 채워주는 역할(filler)을 담당하는 작은 꽃

** 그린 소재 : 초록색 잎을 활용하는 화재로 꽃다발에 싱그러움과 풍성함을 주는 효과를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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