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 제도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다가도 해가 지기 전이면 꼭 집에 들어왔다. 저녁 먹기 전 시간에 TV에서 만화 영화를 방영해 주기 때문이었다. 요즘 같은 OTT 시대에는 아무 때나 원하는 콘텐츠를 볼 수 있지만, 나 어릴 때만 해도 TV 방송이 아니면 만화 영화를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밖에서 흙모래를 뒤집어쓰며 신나게 놀고 집에 오면 깨끗하게 씻고 TV 앞에 앉았다. 아이들이 TV 상자에 넋을 잃고 있을 때면 엄마는 부지런히 저녁 밥상을 준비했다. 그 옛날 우리 집 저녁 풍경은 늘 이러했다.
그 당시 즐겨보던 만화 중 하나는 <오즈의 마법사>였다. 지금도 만화 주제곡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캔자스 외딴 시골집에서 어느 날 잠을 자고 있을 때
무서운 회오리바람 타고서 끝없는 모험이 시작됐지요
오즈는 오즈는 어떤 나라일까요
하얀 눈나라일까 파란 호수의 나라일까
허수아비 친구야 우리 함께 가보자
오즈의 마법사는 어떤 사람일까요
코가 빨간 코일까 희고 노란 곱슬머리일까
겁이 많은 사자야 우리 함께 가보자
멀고도 험한 모험의 길 우리는 끝까지 헤쳐나간다
아름다운 나라 오즈로 꿈의 세계 오즈로
<오즈의 마법사>에 나온 주요 내용은 위 동요에 깔끔하게 요약 정리 되어있다. 아쉬운 부분은 도로시가 사랑하는 반려견, 토토와 모험 중 만나게 된 친구, 양철 나무꾼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꽤 중요한 등장인물인데 말이다. 그리고 잘못된 내용이 하나 있다면 오즈의 세계는 아름다운 꿈의 나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노래 가사에는 도로시 일행이 오즈가 사는 세상에 도착하기 전까지 믿고 있었던 기대감을 표현했던 것 같다.
워낙 오래전에 봤던 동화라서 난 책 내용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노래에 나온 가사 정도로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얼마 전 나의 글친구가 브런치에 올린 <오즈의 마법사> 독서 후기를 읽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오즈가 마법사가 아니었다니?’ 오즈는 알고 보니 평범한 인물인데, 사람들이 자신을 마법사라고 생각하자 계속 거짓말을 낳는 괴짜 사기꾼에 불과했다. 어린아이들이 보는 책인데, 동심 파괴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은 생각에 살짝 배신감이 들기도 했다. 아무래도 다시 그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도 같이 도로시와 회오리바람을 탄 것처럼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느 날 이상한 나라에 떨어진 도로시는 세 친구를 만나 모험을 떠나게 된다. 짚으로 만들어진 허수하비는 뇌를 갖는 것이 간절한 소망이었다. 스스로가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믿어서인지, 그는 자신의 생각을 섣불리 말하지 않고 깊이 고민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양철 나무꾼은 심장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이 메말라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생명체도 소중히 여겨야 한다며 벌레 한 마리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그는 사실 따뜻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겁이 많은 사자는 작은 강아지 토토를 보고도 으르렁 거리며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다. 하지만 모험 도중 위험한 순간마다 맞서 싸움으로써 친구들을 지켜내는 용기 있는 동물이었다. 이들은 스스로에게 없는 것을 갈망하며 오즈의 마법사에게 부탁하러 떠나지만, 알고 보면 이미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알고 행동하는 멋진 친구들이었다. 요즘 말로 표현하자면 메타인지가 높다고 할 수 있겠다.
어린이 책이지만 어른이 보기에도 꽤 깊이 있는 교훈을 곳곳에서 찾고 나니 이 감흥을 당장 누군가와 나누고 싶었다. 저녁을 먹으며 남편한테 이야기를 꺼냈다.
“오즈의 마법사 내용 기억나?”
“흠..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거 경제 이야기잖아?”
“뭐? 오즈의 마법사가 경제 이야기라고? 무슨 소리야?”
“그거 금본위제 내용이 숨어있는 이야기라고 들었어. 그 여자 아이가 계속 노란 길 지나가잖아. 그 길이 금본위제를 상징하는 거야.”
내가 읽은 내용과 완전히 딴 소리를 하는 신랑을 보며 나는 두 번째 충격을 받았다. 검색창에 ‘오즈의 마법사 금본위제‘라는 키워드를 입력해 봤다. 신랑의 말이 사실이었다. 이 책의 내용은 1900년대 초 미국의 통화제도와 관련이 있다고 한다. 1990년에 경제학자 휴 로코는 ‘통화 우화로서의 오즈의 마법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냈다고 한다. 도로시는 은색 구두를 신고 에메랄드 시에 사는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기 위해 노란 벽돌길을 걸어간다. 은색 구두는 은본위제, 노란 벽돌길은 금본위제, 오즈는 금을 재는 단위 온스(ounce)의 약자 OZ, 에메랄드 시는 링컨이 발행했던 그린백(초록색 달러)을 상징한다고 한다. 무심코 읽었던 단어 속에 이런 경제 역사적 의미가 숨어있었다니 놀랍다.
금본위제는 금을 보유한 양에 비례해서 돈을 찍어낼 수 있는 화폐 제도이다. 1873년 미국이 금본위제를 채택하자 금 보유량이 풍부했던 미동부의 자본가들은 큰 부를 얻을 수 있었고, 상대적으로 농민과 산업 노동자들은 더 팍팍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 내용을 알고 나니 책 속의 내용이 더 현실적으로 와닿기 시작했다. 평범한 미국 서민(도로시)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낯선 세상으로 회오리바람을 타고 가게 된다. 다시 내가 살던 익숙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간절함은 경제적 고충이 덜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농민(허수아비)과 산업 노동자(양철 나무꾼)는 빈곤에 시달리다 보니 정치적 지도자(마법사)를 찾아가 자신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달라고 호소하고 싶었던 것 같다.
<오즈의 마법사> 작가, L 프랭크 바움은 도로시 일행이 겪은 험난한 여정을 통해 금본위제로 인해 겪은 미국 사회의 혼란을 표현했다고 한다. 단순히 책 속에서 숨은 그림 찾기 하듯이 과거 미국 경제 역사를 찾았다는 흥미로만 끝낼 일이 아닌 것 같다. 우리한테 이름조차 낯선 ‘금본위제’는 1933년에 폐지되었다고 한다.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요즘의 세상은 변화의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르다. 소용돌이처럼 재빠른 변화의 물살 속에서 앞으로의 화폐 제도와 자산의 가치가 어떻게 변해갈지 상상만 해도 어지럽다. 가상화폐에 대한 관심과 투자 열풍이 불면서 벼락 부자와 벼락 거지가 많아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가상화폐가 실생활에서 통용되고 그 위상이 점점 더 올라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계와 재계의 지도자들이 현명한 판단으로 이끌어줬으면 하고 바라고 싶지만, 동화 속 이야기를 보고 나니 그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줄어든다. 오즈의 마법사처럼 사기 치는 일만 안 해도 다행이다. 도로시 일행처럼 나에게 필요한 지혜와 용기를 험난한 여정을 거치며 스스로 찾아가야 할 일이다. 갑작스러운 세상 분위기 변화에도 휩쓸리지 않도록 오늘도 신문을 펼치고 세상 이야기를 들어보고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본다.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지혜와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단단한 마음 근육을 기르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