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속 경제 이야기
아이가 어릴 때 그림책을 읽어주다 보면 가끔은 내가 더 흠뻑 빠지게 될 때가 있었다. <골디락스와 세 마리의 곰> 역시 그랬다. 이야기의 내용은 아주 간단하다. 금발머리를 한 소녀 골디락스가 어느 날 숲 속을 헤매다가 배가 고파서 빈 집에 들어가게 됐다. 집 안에는 수프 세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다. 골디락스는 3그릇의 수프를 모두 맛보았다. 가장 큰 그릇의 수프는 너무 뜨겁고, 중간 그릇 수프는 차갑고, 제일 작은 그릇의 수프는 먹기 딱 좋은 온도였다. 골디락스는 가장 먹기 적당한 온도의 수프 그릇을 싹 비운 뒤 나른해진 몸을 침대에 뉘었다. 소녀가 잠든 후 빈 집의 주인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이 집의 주인은 곰 세 마리였다. 누군가 집 안에 다녀간 흔적을 보고 곰 가족은 누구였을까 수상해하며 집 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침대의 소녀를 발견했다. 그때 소녀가 잠에서 깨어 화들짝 놀라 집 밖으로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별 내용이 없는 것 같지만 이 책을 읽어주면 아이는 곰 가족 흉내를 되며 까르르 즐거워하곤 했다.
골디락스는 영국 전래동화 이야기라서 그런지 여러 그림책 작가가 자기만의 느낌을 살려서 그린 다양한 버전을 볼 수 있었다. 어스본 출판사에서 나온 수채화 같은 그림은 사랑스러운 분위기가 좋았다. 닉샤렛 작가님의 그림책에서는 금발머리 소녀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서 표현한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내가 베스트로 꼽는 골디락스 그림책은 모 윌렘스 작가님 버전이었다. 원작의 세 마리 곰을 공룡으로 바꿔서 패러디한 작품인데, 모 윌렘스 작가님 특유의 위트 있는 그림체와 스토리가 좋아서 반복해서 종종 봤다. 내가 골디락스 이야기를 사랑한 이유는 다채로운 그림체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골디락스 그림책을 종류별로 도서관에서 빌려오는 모녀를 보며 곁에서 남편이 반가운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어, 골디락스네? 경제학 시간에 배웠던 건데…”
같은 책을 봐도 남편은 늘 경제학도의 시선에서 바라보나 보다. 도대체 이 전래동화 속에 무슨 경제 이야기가 숨어있는 것일까?
뭐든 너무 과열되지 않고, 반대로 냉기 또한 돌지 않는 게 좋은 법이다. 특히 경제 상황에 있어서는 더 그렇다. 경제가 성장세를 보이면 고용 지표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고용 상태가 좋아 임금을 많이 받으면 소비 지출이 늘게 되고, 자연스럽게 물가 상승이 동반된다. 그래서 ‘경제 성장’과 ‘안정적인 물가 수준’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것이 현실적으로 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1990년대 미국 경제에서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었다고 한다. IT 기술 발달로 생산성이 향상되면서 물가 상승을 일으키지 않은 채 동시에 경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90년대 후반 미국에서 낮은 실업률(높은 고용률)과 낮은 인플레이션 상태를 유지했던 이례적인 호황을 보고 사람들은 ‘골디락스 경제’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 속에서 소녀가 적당히 따뜻한 수프를 선택한 것처럼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적당한 경기 상황을 우리 손으로 선택할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아름다운 동화 속 이야기답게 이상적인 경제 상황은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는 게 씁쓸하다. 그래도 가끔 뉴스에서 골디락스를 기대하는 소식이 들리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 찾아온 어마무시했던 인플레이션이 이제 슬슬 가라앉는 것일까? 미국 고용지표는 여전히 좋은 편인데, 자산 시장 분위기 역시 좋아서 골디락스 경제를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1990년대 IT 혁신과 함께 생산성이 향상됐던 것처럼, 현재 나날이 발전 중인 AI 기술이 골디락스 경제에 대한 기대감을 더 키우고 있나 보다. 우리나라는 수출 경기가 회복되고 있지만 아직 내수가 부진해서 많이 어렵다는데, 미국의 골디락스 기대감 소식이 기쁘면서 동시에 부럽기도 하다. 우리 경제 뉴스에서도 ’골디락스‘라는 반가운 단어를 자주 볼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