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가비를 모으던 마음 같은 것

by 화진


“눈빛으로 그림을 뚫을 수 있나 없나 시험하시는 겁니까?”


귀 가까이에서 들리는 나직한 말에 문비는 화들짝 놀라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문비가 눈을 세모꼴로 찡그리더니 다가가서 주먹으로 등짝을 한 대 쳤다.


“윽.”


과장된 비명을 소리죽여 내면서 쓰러지는 시늉을 하는 그를 향해 문비가 작게 물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는 전시회 같은 데 오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냐? 나도 나름 그림 좋아하거든?”


“아니, 인우 네가 왜 여기 대한민국에 있냐고.”


말과는 다르게 문비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환영의 빛이 가만히 번졌다. 생각지도 않았던 조우여서 더욱 기뻤다. 아직 친구의 얼굴을 뚜렷이 볼 수 있을 때 이렇게 다시 볼 수 있어서.


“야, 여기 대한민국이 내 조국이거든. 그런데 왜 여기 있냐고 물으시면 제가 대한민국 국민이라서, 라고 대답할 밖에.”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린 문비가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인우가 주먹을 맞부딪더니 나가자는 손짓을 했다. 로비로 나가니 세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 꼭 봐야 한다고 우기더라니. 둘이 작당한 거지? 나 놀라게 하려고.”


문비가 미심쩍게 흘겨보자 세진과 인우가 킥킥 웃었다.


“그래서 놀랐어? 놀랐다면 우리는 흐뭇하고.”


세진이 문비의 어깨에 팔을 두르면서 말했다.


“놀랐지. 놀랐고, 이렇게 셋이 모이니까 좋다.”


세 친구는 대학생이었을 때 단골로 다니던 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불판 위에서 지글거리는 냉동 삼겹살과 기포가 뽀글뽀글 오르는 소맥을 앞에 놓고 인우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박수까지 쳤다.


“이거지, 이거야. 외국 살면 이런 게 얼마나 그리운지 아냐? 마무리는 김치찌개에 라면 사리 추가, 오케이?”


“여보게 자네, 오버하지 마. 로마에도 한식당 있잖아.”


세진이 말하자 인우는 그래도 그게 그런 게 아니라고 항변했다.


“세발아. 프랜차이즈도 점포마다 맛이 다른데, 로마의 냉삼과 여기 냉삼이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니?”


세진은 자기가 졌다는 듯 설레설레 체머리를 흔들고는 잔을 들었다.


“난 인우 얘가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씩이나 가기에 조수미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는 못 되더라도 발전이라는 게 좀 있겠거니 했는데 보니까 실없는 소리만 늘었네. 그치 문비야?”


“뭐라도 는 게 있으니 다행이라고 치자. 오랜 친구인 우리라도 어떻게든 따습게 봐 줘야지 어쩌겠니.”


잔만 부딪치고 입에는 대지도 않은 소맥을 내려놓으며 문비가 웃었다.


“내가 외로워서 이렇게 됐다. 외로워서. 너네도 낯선 타국에서 살아 봐라. 그럼 알게 될 거야. 모국어로 하는 실없는 소리와 농담이 얼마나 소중한지.”


인우가 세진과 문비를 차례로 보며 풀죽은 소리를 했다. 더욱 더 소중한 건 너희라는 눈길이었다. 언제 어떤 말을 해도 찰떡같이 알아듣고 콩떡같이 받아치는 친구들이 없다면 또 그게 다 무슨 재미냐고.


“그래. 인간이란 태생적으로 외로운 존재라지만 네가 조금 더 외로울 수는 있겠다. 자, 마셔. 마시자.”


세진이 자신의 술잔으로 인우의 술잔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두 친구는 문비가 첫 잔을 그냥 내려놓는 걸 본 뒤로 문비에게는 술을 권하지 않았다. 오늘은 마시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겠거니 이해했다.


“오, 한세발. 이제야 좀 대화가 되네. 그렇지. 인간은 태생적으로 외롭지.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웃음이라는 선물을 주신 거라고.”


“실없는 소리와 농담을 할 수 있는 재치와 함께 말이지?”


인우와 세진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을 들으면서 문비는 잘 익은 고기를 골라 둘의 앞 접시에 놓아 주었다.


“웃음과 재치가 신의 선물이라면 말이지, 내가 인우 널 대신해서 신께 사과드리고 싶어지는 밤이다.”


문비의 말에 인우가 그건 또 무슨 터무니없는 말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네가 자주 그 신의 선물을 저렴하고 헛되이 남용하니까 말이야.”


세진과 인우가 동시에 푸핫 하고 웃었다. 둘이서 늘어놓은 말의 도미노를 문비의 농담이 툭 쳐서 와르르 넘어뜨려 완성한 듯 통쾌한 기분이었다.


셋이서 이렇게 시시하지만 즐거운 화젯거리를 공처럼 서로 툭툭 던지고 받아치는 동안에는 누구의 외로움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것이 태생적인 것이든 경험적인 것이든.


친구들을 보면서 문비는 자신의 불운을 털어놓는 시기를 유예할 수 있을 때까지 유예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였다. 혼자 모르는 척하는 것이, 셋이 함께 모르는 척하거나 아무 일도 아닌 척해야 하는 것보다 견디기 쉬울 테니까.


추운 밤이었지만 거리에는 연초의 들썩임이 떠다녔고 만남과 모임을 위해 나온 사람들은 얼마간 들떠 있었다. 비정한 시간의 흐름이 부쩍 무섭고 아까워진 문비로서는 들뜸에 물들지는 못해도 그 속에 섞여 있는 것까지 괴롭지는 않았다. 곁에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었으므로.


그러니까 이 흥성거리는 밤을 거닐고 있는 문비의 마음이란 어릴 적 별을 세던 마음 혹은 바닷가 모래 속에서 조가비를 모으던 마음 같은 것이었다.


차를 가져온 건 인우였고 술을 마시지 않은 건 문비였기에 귀갓길의 운전은 문비가 맡았다. 셋 중 집이 가장 먼 세진을 먼저 내려주고 둘만 남았을 때 문비가 말했다.


“우리집으로 갈게. 거기서 대리 기사 불러서 가도 되지?”


“안 그래도 그러자고 할 참이었다.”


“네 부모님께 드릴 게 있는데 그것도 갖고 가고.”


“드릴 거? 뭐?”


“별 건 아니고. 새해 선물 겸, 나도 뭔가 드리고 싶어서. 맨날 받기만 하잖아.”


“아까부터 쭉 느꼈는데. 가문비, 너 오늘따라 뭔가 좀 달라진 거 같아.”


“달라지긴 뭐가 달라져? 난 그냥 난데.”


내심 뜨끔하면서도 문비는 시미치를 뚝 떼었다.


“뭔가 말이지, 너…… 어른 같아. 나나 세발이는 모르는 세계로 너만 점프한 것 같달지…….”


문비의 눈에 씁쓸함이 어룽졌다.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희들이 모르는 그 세계가 고뇌와 고통, 슬픔 그런 이름의 안개로 자욱한 곳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