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렬했던 한파가 한풀 꺾인 아침, 도둑눈이 와 있었다. 적설량은 고작해야 1센티미터도 되지 않았으나 산동네 하나 순백으로 덮기에는 모자람이 없었다. 깊은 밤과 새벽 사이에 고요와 함께 뿌려진 가루눈에 감싸인 나무와 집이 마치 슈거 파우더 뿌린 거대한 과자 같았다.
라한은 잠시 새벽의 박명 속에 서서 건너편의 낙엽송과 집을 바라본다. 빈집, 그녀가 없는 집, 한때 그녀가 있었던 집. 라한은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편지를. 그러므로 그의 하루는 또 다시 그녀의 편지를 읽는 것으로 시작될 것이다.
작업대 앞으로 간 라한은 서랍을 열어 흰 봉투를 집는다. 읽을 때마다 심장에 살얼음이라도 끼는 듯 가슴이 시린 편지를 꺼내서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다시 읽는다.
이 글을 당신이 읽고 있다는 건 결국 내가 용기를 내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의 앞에 설 용기, 늘 사색적인 빛을 띤 채 다정하던 두 눈을 마주할 용기 말입니다.
나는 미리 준비한 이 글을 간직한 채 당신을 바라보겠지요. 약속 장소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유리창과 유리창 너머로. 내일 오전에 말입니다. 네, 지금은 전날 밤입니다.
이렇게 된 이상, 지체하지도 에두르지도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우리 사이의 끝을, 안녕을, 이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알아요. 당신에게는 불쾌하거나 노여울 수도 있는 날벼락일 거라는 걸. 알지만 나로서는 이렇게 무례하다면 무례하고 부당하다면 부당한 방식으로 끝낼 수밖에, 구차하게 부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우리의 이별에 당신은 아무런 잘못도 실수도 책임도 없음을 확실히 밝혀 두기 위해서입니다. 정말이에요. 모든 것이 나의 탓입니다. 나의 결함, 나의 나약함, 나의 이기심, 나의 비겁함...
모호하게 생각되겠지만 엄연한 사실입니다.
고마웠어요. 진심입니다. 사랑받은 경험은 마음에 들여놓는 볕살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에 대해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게 된 지금 사랑의 기억이 있어 나는 덜 무너지고 덜 황폐해졌을 겁니다.
이기적이고 비겁한 주제에 당신에게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너무 느리지도 않게 너무 빠르지도 않게 그리고 가급적이면 번민 없이 당신의 안에서 우리의 추억이 자연스럽게 옅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나를 원망하거나 미워해도 괜찮습니다.
라한은 몇 번을 되풀이해 읽은 편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봉투에 넣고 서랍에 보관한다. 그의 눈빛은 허허롭고 슬프다. 답은 알겠는데 풀이를 내놓지 못하는 문제를 풀고 있는 심정이다.
그녀가 원하는 답은 명백했다. 이대로 서로 무관한 타인이 되는 것. 그녀는 무려 세 번에 걸쳐 선언했으니까. 끝, 안녕, 이별이라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생각과 아무래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는 느낌이 라한의 머릿속에서 치열하게 대립했다.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지 세찬 바람에 작업실 문이 휙 열리면서 탕 하고 벽을 쳤다. 바람이 눈을 쓸어가면서 라한이 남긴 발자국을 지운다. 어떻게, 어떻게 우리가? 라한은 뼈아픈 상실감을 억누른다. 그때 며칠 전 본가에서 할머니가 지나가듯 하셨던 말씀이 떠오른다.
‘얼마 전에, 앞집의 그 문비씨를 우연히 만났지 뭐겠니. 치과 갔다가 들렀던 약국에서.’
옆에 다른 식구들도 있었고 할머니는 라한과 그녀의 관계를 모르기에 라한은 그저 ‘대단한 우연이네요. 그래서 반가우셨어요?’ 했다. 할머니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대화를 끝냈다.
돌이켜 떠올리고 있자니 할머니의 눈짓이 은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던 것도 같은 건 기억의 윤색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라한은 할머니에게 더 상세한 얘기를 들어 보고 싶다. 그날의 그녀에 대해. 설령 이 마음이 답에 끼워 맞춰서라도 풀이를 찾고 싶은 마음일지라도.
전화로 라한의 질문을 받은 할머니는 다른 용건도 있으니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다른 용건이 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갔다. 언젠가 할머니가 말씀하셨던 골프장 문제일 것이다. 그 문제라면 라한은 더 할 말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라한은 할머니에게 지고 말았다. 다음날 점심 무렵 그는 할머니가 단골로 다니는 호텔 식당의 룸에서 할머니를 만났다.
“점심부터 먹자. 얘기는 차차 하고.”
집이 아닌 곳에서 할머니와 둘만 따로 만나는 것이 처음이어서인지 사업가적 면모를 물씬 풍기는 할머니의 차림새와 분위기 때문인지 라한은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차례로 나오는 음식을 먹는 동안은 가족으로서의 가벼운 대화만 주고받았다. 후식이 나오고 나서야 소혜 여사가 먼저 본격적인 대화의 운을 뗐다.
“그날 약국에서 문비씨 만난 얘기를 자세히 듣고 싶다고 했니?”
“네.”
“너희 둘, 무슨 일이 있는 게야. 그렇지?”
소혜 여사가 의표를 찔렀다. 라한은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의 그늘진 모습을 보는 소혜 여사의 낯빛도 어두워졌다.
“나는 아직도 뼛속까지 사업가다. 지금까지 내가 원하는 걸 이루기 위해서라면 위법 행위가 아닌 한은 무슨 일이든 했다. 그래서 말인데 네가 듣고 싶은 그 얘기를 내가 들려주면 넌 나에게 뭘 내놓을 거니?”
부드러운 말투와 냉정한 내용에 라한은 당혹스러웠다.
“할머니…….”
말을 잇지 못하던 라한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식이라면 그로서는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했다.
“알았다. 앉아라. 방금 내가 한 말은 안 들은 것으로 치고.”
라한은 착잡한 표정으로 다시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