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어리석음

by 화진


소혜 여사는 손자를 지그시 응시했다. 핏줄이 이어져 있지 않은 손자, 외모든 내면이든 자신과 닮은 데가 조금도 없다고 느껴지는 손자. 그래서 한 가족이 되고도 꽤 오래 서로 데면데면했고, 지금은 자신과 다른 바로 그 부분들 때문에 더욱 좋아하고 아끼는 손자.


못마땅한 기색으로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심각하고 공허해 보였다. 이에 대해 소혜 여사는 꽤 그럴듯한 답을 가지고 있었다. 정황과 추리, 지난 가을 그 산골짜기 동네를 방문했을 때 목격했던 한 장면을 조합하여 도달한 결론이었다.


그 한 장면이란 깨금이와 산책을 다녀오던 라한이 길 가에서 문비와 마주쳐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던, 지극히 사소하고 예사로운 것이었다. 마침 혼자 마당에 나와 있던 소혜 여사의 시야에 자연스럽고 무심하게 들어온 광경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집이 있는 언덕 아래의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 옆 도로에 두어 걸음 정도 떨어져 서 있었다. 가을 해거름의 부드러운 빛에 휘감긴 그들 주위로 잠자리 몇 마리가 날개를 반짝이며 날아올랐다.


소혜 여사에게 건너다보이는 건 그들의 옆얼굴이었다. 거리 때문에 정확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손자의 모습에서 사랑의 징후를 감지할 수는 있었다. 소혜 여사는 경솔하거나 경박한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자신의 직감이 빗나갔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긴 했지만.


오늘 확실해졌다. 그날의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내심 너희 둘이 이어지기를 바랐단다. 잘 어울려 보였거든. 그런데 어제 갑작스럽게 네가 전화를 해서는 나로서는 심상찮게 여겨질 수밖에 없는 질문을 했어. 그리고 오늘은 어떻게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듣겠다고 이렇게 달려왔지. 도대체 무슨 일일까?”


차근하게 말하던 소혜 여사는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라한은 할머니를 마주 쳐다보았다. 할머니의 표정에 확실히 씌어 있었다. 무슨 일인지 알기 전에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다고.


라한은 안주머니에서 문비의 편지를 꺼내 할머니에게 건넸다. 그 편지가 할머니 손에서 펼쳐지고서야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제대로 깨달았다. 스스로에게 놀랐지만 후회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들의 일을 간단한 말로 가볍게 뭉뚱그리고 싶지 않았다. 전달의 간편성을 위해 깎이고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따로 부탁하지 않아도 할머니가 이 일을 함구하리라고 라한은 믿었다. 그의 믿음을 증명하듯 소혜 여사는 다 읽은 편지를 신중하게 갈무리하여 돌려주면서 말했다.


“나를 믿고 이걸 보여 주어 고맙다. 네 믿음은 저버리지 않으마.”


“저는 정말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됐는지. 그리고 편지를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말이다. 남녀 사이라는 건, 어느 한쪽이 그만하자고 하면 그 시점에서 끝인 거 아니겠니? 나는 그렇게 보는데.”


문비가 떠난 데에는 그녀 나름의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게 소혜 여사의 판단이었다. 그렇다면 깨끗이 보내주는 것도 사랑이 아닐까 싶었다.


“절대로 놓지 못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문비씨가 어떤 상황에서 이 편지를 썼는지 알고 싶을 뿐이에요. 제가 모르는 곤경에 빠져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아무 일 없다면, 그저 마음이 변한 거라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납득하고 받아들여야죠.”


“무슨 말인지 알겠다.”


약국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날의 문비를 떠올리며 소혜 여사는 곤경이라는 낱말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 어쩌면…….


“그날, 약국에서 약을 받고 우리 차를 기다리고 앉았는데 마침 그 약국에 문비씨가 들어오더구나. 들어오면서는 나를 못 봤지.”


문비는 좀 해쓱해 보였고 약사와는 구면인 듯한 분위기였다.


“나는 계속 보고 있었고, 약을 가지고 돌아서던 문비씨도 나를 알아보았지. 싹싹하게 인사를 하더라만 왠지 당황스러워 보이기도 했어.”


라한의 눈동자가 검게 빛났다. 이 대목 때문이었다. 그가 할머니에게 그날의 만남에 대해 다시 들어 봐야겠다고, 작은 부분까지 낱낱이 알아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이제 와 돌이켜 보니 아마 약사가 무심코 입에 올렸던 말들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구나.”


“약사가 무슨 말을 했는데요?”


조바심이 난 라한이 할머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물었다. 소혜 여사는 가늘게 뜬 눈으로 기억을 되살려냈다. 약사가 상대한 손님이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관심 없이 흘려듣고 잊었을 수도 있지만 하필 문비였기에 귀를 쫑긋했던 것이다.


“문비씨가 가져가는 약에 대한 말이었는데. 비급여니 워낙 고가라느니 그랬던 것 같구나. 그래서 약의 혜택을 못 보는 사람들이 많다고. 안타까운 일이라고. 그런 내용이었다. 맞아, 확실해. 그런 말이었어.”


약, 비급여, 고가. 침울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말들이었다. 라한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또 다른 거 기억나시는 건요? 병원이라든지…….”


“그래, 병원. 내가 다니는 치과 옆에 크고 유명한 눈 전문 병원이 있어. 거길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지.”


“눈 전문…….”


두서 없이 한꺼번에 재생되는 회상의 장면과 음성들로 라한의 머릿속이 터질 듯 윙윙거렸다. 문비, 그녀…… 잠깐 시야가 이상했다던가. 어스름한 길에서 넘어져 상처가 난 적도 있었지. 잠깐 눈앞이 하얬다던가. 병원에 다녀왔다고, 아무 일 없다고, 다 괜찮다고 해 놓고…….


이 지경에 이른 건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라고, 라한은 자책했다.


반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있는 라한을 소혜 여사가 불렀다.


“라한아. 얘야…….”


라한은 천천히 일어나 할머니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얘야. 우선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침착하게 심사숙고하렴.”


나가는 손자의 등에 대고 소혜 여사가 타일렀다. 문비 스스로 연락을 끊어 버리고 자신을 숨기려 하는 이상 라한이 그녀를 찾을 방법은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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