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라한은 문비를 찾기 위해 그녀와 연락하기 위해 정신없이 헤매고 애썼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문비의 단절은 철저했다. 그녀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지 않았고, 핸드폰을 꺼 두었으면, 라한이 연락할 만한 주변인들에게는 입단속을 해 두었다.
집에 돌아온 라한을 본 은성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집을 나설 때의 그가 아니었다. 밝고 활기찼던 얼굴이 초췌하게 시들어서는 망연한 슬픔에 젖어 있었다. 맥없는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오는 동생을 보면서 은성은 아무 말도 못했다.
라한은 현관 앞에 서 있던 은성을 그냥 지나쳤다. 꼬리를 흔들며 반기던 깨금이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고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깨금이는 욕실 문 근처로 가 엎드렸고 은성은 하릴없이 거실 소파에 앉아 수틀을 다시 들었다.
자수바늘이 미세하게 자꾸 빗나갔다. 은성은 수틀을 내려놓고 창문으로 다가가서는 유리 세정제를 뿌려 유리창을 닦기 시작했다. 창의 유리는 하나씩 깨끗하고 투명해졌지만 마음을 흐리는 먹구름은 흩어지지 않았다.
아픔이나 괴로움에 민감하게 공명하는 은성의 가슴이 불안하게 두근거렸다.
은성은 불과 한 시간도 지나지 않은 어머니와의 통화를 되새겼다. 어머니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평온하고 다정했다. 적어도 집에는, 가족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라한을 저토록 깊은 상심에 빠트릴 만한 일이 무엇이 있을까?
수건을 놓친 은성이 가슴께에 두 손을 모았다. 오직 한 사람뿐일 터였다. 라한에게서 모든 빛과 생기를 앗아갈 수 있는 건.
설마 그럴 리가……. 은성은 동그란 머리를 세게 가로저었다. 하지만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인가. 은성은 쓰라린 한숨을 토해내고 주방으로 갔다.
뭐가 어찌 되었든, 우선은 부드럽고 따뜻하고 영양가 있는 걸 좀 먹여야 해. 은성은 한참 동안 부지런을 떨어 게살스프와 표고버섯두부찜을 만들었다.
“점심 먹자.”
은성이 노크하고 라한의 방문을 열었다. 책상에 앉은 라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진자 운동을 하는 키네틱 아트 스탠딩 모빌에 멍하니 고정되어 있었다. 은성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밥 먹자고.”
“나중에.”
라한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송라한.”
단호하게 부르며 은성이 책상 옆으로 가서 섰다.
“미안해, 누나. 지금은 도저히 목으로 뭔가가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 이해 좀 해줘.”
은성을 돌아보며 라한이 높낮이 없는 어조로 부탁했다.
“그럴 수 없어. 같이 먹어. 네가 안 먹으면 나도 안 먹을 테니까. 나를 진심으로 누나로 여긴다면 일어나. 안 그럼…….”
전에 없이 엄격하고 딱딱한 말투였다. 그렁그렁해진 두 눈에 힘을 잔뜩 준 은성이 라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라한은 뿌리치지 못하고 은성에게 이끌려 식탁으로 갔다.
“나, 딱 네가 먹는 만큼 먹을 테니까 알아서 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은성은 라한이 수저를 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정말로 그가 먹는 것을 그대로 따라 먹었다.
“마음이 힘들수록 잘 챙겨 먹고 잘 자야 해. 억지로라도 그래야 해. 몸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야. 그러니까 몸의 힘이 있어야 마음의 힘도 낼 수가 있는 거야.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포기해 버린 게 아니라면, 어떻게든 힘을 내야 하잖아.”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은성이 말했다.
“누나…….”
자그마하고 여린 은성이 문득 커다랗고 굳건한 사람으로 보여서 라한은 정신이 번쩍 나는 듯했다.
“남들 눈에는 하찮고 보잘 것 없게 보일 나지만, 나도 나름대로는 고군분투하면서, 많은 걸 이겨내면서 살아왔어. 그리고 난 네 누나야. 그러니까 내 말 허투루 듣지 마.”
척추 장애로 말미암은 굽은 윗등과 작은 키로 서른 해를 넘게 사는 동안 은성에게도 곡절과 위기는 많았다. 무심코를 가장한 악의에 숱하게 상처 받았고, 때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어두운 유혹에 시달리기도 했었다. 그러나 은성은 살아남았고, 지금도 이겨내는 중이었다.
“살면서 알게 됐어. 그래도 나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이라는 걸. 우리 가족, 가족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 그리고 많지는 않지만 내가 만난 선한 타인들. 이런 것들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 아니니까. 이런 것조차 못 가진 사람들도 많으니까.”
동그란 눈을 진지하게 빛내며 은성이 제법 길게 그러나 명확하고 조리 있게 자신의 의견과 생각을 피력했다. 본디 남을 가르치려 든다거나 설교를 늘어놓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은성으로서는 매우 예외적인 순간이었다.
라한은 은성의 신산했을 삶과 그런 삶을 꽉 붙든 채 오늘날까지 견디며 돌파해온 의지가 새삼 숭고하게 느껴졌다. 동생으로서 자랑스러웠다.
“누나는 그 누구보다 충분한 자격이 있어. 지금보다 더 크고 많은 사랑과 운을 누릴 자격이. 누나가 해준 말들 허투루 안 들어. 고마워.”
“그래야 내 동생이지.”
식사를 마치자 은성은 한숨 자고 나오라며 라한의 등을 떠밀었다. 그가 며칠이나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하지 못했음이 충혈된 눈자위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침부터 찌뿌드드 인상을 쓰고 있던 하늘이 싸라기눈을 흩뿌리기 시작했다.
* * *
암자의 떠돌이 개가 멀찍이에서 문비를 따라오고 있었다. 문비는 몇 번인가 시험 삼아 개를 부르며 손짓을 해 보았다. 무섭지 않아서가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무상아. 이리 와. 괜찮으니까 이리 와 보라고.”
문비가 멈추는 순간에 따라서 멈추었던 개는 미동도 않고 그대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문비가 다시 걸음을 떼자 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개는 둘 사이의 일정 간격을 절대로 좁히지 않았다.
“무엇이 널 그렇게 만들었니?”
숲길 가의 마른 섶에 앉은 문비가 개를 돌아보았다. 개도 길가에 앉았다.
“하긴 너처럼 살아서 안 될 것도 없지.”
문비가 중얼거리고는 몸을 일으켜 오던 길을 되짚어 걸었다. 개도 몸을 돌려 암자를 향했다.
삭풍이 겨울나무를 흔들었다. 숲이 내지르는 바람 소리가 날카롭고 쓸쓸했다. 마치 누군가의 흐느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