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만의 폐허

by 화진


앞서 가는 개의 귀가 이따금씩 쫑긋거렸다. 뒤따라가며 바라보던 문비는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검고 뾰족한 귀의 움직임이 바람의 리듬에 맞춰져 있음을.


너도 바람에게 마음을 맡겨 두었니?


순간 개는 우뚝 멈추더니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으로 올라가 버렸다. 저만치 암자 마당에서 공양주 보살이 오전에 널었던 이불을 걷고 있었다. 문비는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그녀를 거들었다.


문비가 다시 암자로 돌아왔을 때 아무도 놀라는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님도, 공양주 보살도, 떠돌이 개까지도. ‘왜 또 왔니?’라든가 ‘얼마나 있을 예정으로?’와 같은 질문도 없었다. 다들 그러려니 했다. 애초에 문비가 떠난 적이 없는 듯이.


그런 반응이 문비에게 편안함을 주었다. 아무것도 설명할 필요 없고, 아무것도 기약할 필요가 없는 자연스러움이었다.


문비는 그림도 그리지 않고 책도 읽지 않았으며 음악을 듣지도 않았다. 대신 공양주 보살의 부엌일과 집안일을 돕고, 스님 옆에 앉아 노간주나무 열매로 염주를 꿰거나 스님이 통나무를 깎아 목어 만드는 걸 구경했다.


셋이 함께 산에 오르기도 했다. 목적은 비나 바람, 눈에 꺾여 떨어진 나뭇가지를 줍는 것이었다. 암자의 땔나무는 원칙적으로 사서 쓰기에 이렇게 주워 보태는 것으로 약간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일거리 겸 운동도 되었다.


암자의 나날은 조용하고 소소한 일들로 채워져 유유히 흘러갔지만 문비에게는 결코 쉬이 지나가는 시간이 아니었다.


문비는 남들이 볼 수 없고 들어올 수 없는 자신만의 폐허에서 많은 것을 인내하는 중이었다. 한때 삶의 신비나 꿈, 희망이나 낙관 같은 것들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폐허로 변한 곳에서 문비는 길을 잃었다.


어느 날인가는 아찔한 벼랑이나 협곡을 내려다보면서 한 발만 내디디면…… 하고 생각하다 제풀에 소스라친 적도 있었다.


“아기, 물 부어 줄 테니 손 씻으렴. 오늘 저녁은 만두나 빚어 먹자꾸나.”


이불을 다 걷어 들이고 나자 공양주 보살이 부엌에서 따뜻한 물을 한 바가지 들고 나왔다. 문비는 손을 씻기 위해 외투를 벗어 마루로 던졌다. 그 서슬에 외투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와 마루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어라, 나뭇조각이네? 이건 뭐에 쓰는 거니?”


한손에 자루 긴 바가지를 들고 한손으로는 떨어진 것을 주워든 공양주 보살이 물었다. 손안에 들어오는 크기의 나뭇조각은 정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뭇조각을 받아 다시 외투 주머니에 넣으며 문비가 얼버무렸다. 길쭉한 타원형의 나뭇조각은 바이올린의 내부에 들어가는 블록 중에서 옆면의 아래쪽에 고정하는 가문비나무 블록.


언젠가 문비가 라한의 작업대에서 장난삼아 슬쩍한 것이었다. 물론 그는 알면서 모른 체했고. 그가 알면서 모르는 체한다는 걸 문비도 알았고. 그날의 저녁 하늘은 붉고도 푸르게 물들었고, 그 무렵의 두 사람은 자주 웃었고, 그런 날들이 영원할 것만 같던 시절이었고.



* * *



바깥에는 진눈깨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집 안은 고요했다. 식구들이 깨어 하루를 시작하려면 아직 먼, 너무 이른 새벽이었다.


너무 일찍 잠에서 깨어 버린 소혜 여사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커튼을 젖히고 어스름한 창가를 서성였다. 평생을 두고 어렵고 까다로운 선택과 결정을 수없이 해왔고 목표 앞에 망설여 본 일이 없었던 그녀였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였다. 소혜 여사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은 양심의 목소리, 결과적으로 서로가 다 원하는 걸 얻는 일인데 안 될 건 또 무언가 하는 냉철한 목표 지상주의자의 목소리, 두 목소리가 소혜 여사의 뇌리에서 첨예하게 대립했다.


사실 소혜 여사는 알고 있었다. 둘 중 어느 목소리가 이길지. 그렇다면 모두를 위해 결단은 빠를수록 좋을 터였다.


소혜 여사는 날이 밝기도 전에 전화를 걸었다. 그로부터 약 네 시간 삼십 분 뒤 그녀는 라한을 다시 마주했다.


라한은 긴장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소혜 여사는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다. 라한은 할머니가 앉아 있는 회의용 탁자로 가면서 안을 둘러보았다. 꽤 큰 사무 공간이었고 집기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나 일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일단 앉거라. 저런, 얼굴이 많이 안됐구나. 박 변호사가 곧 올 거다. 커피 사오겠다고 나갔거든.”


박 변호사? 라한은 오랫동안 할머니 집안의 일을 맡아 봐 왔다는 변호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쯤 못 돼도 구십 세는 되었을 텐데, 커피를 사러 갔다고?


“할머니. 박 변호사님이라면 그…….”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라한보다 열 살쯤 연상으로 보이는 인상 좋은 여성이 생긋 웃으며 들어왔다.


“서로 인사들 해라. 라한아, 내가 말한 박 변호사다. 네가 떠올렸을 그 박 변호사의 둘째 딸이란다.”


“처음 뵙겠습니다. 송라한입니다.”


“반가워요. 박혜욱이에요.”


박 변호사가 커피를 내려놓고 손을 내밀었다. 라한은 그녀와 악수했다.


“자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회장님, 저는 일층 카페에 가 있겠습니다.”


혜욱은 소혜 여사에게 한쪽 눈을 찡긋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라한은 커피는 핑계였음을 눈치챘다. 그러니까 자신과 박 변호사를 인사시키기 위한.


“할머니. 여기는 어디인지, 제가 왜 박 변호사님과 인사해야 했는지, 여기에 오면 제가 찾아 헤매던 걸 찾게 될 거라던 말씀의 진의는 또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우리 얘기가 잘 되면, 박 변호사는 앞으로 너와 함께 일하게 될 거다. 물론 너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게 될 테고.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그 말씀은…… 문비씨가 어디에 있는지 아신다는 말씀이세요?”


“알다마다. 너도 알다시피 내 인맥 안에는 그런 쪽의 일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들도 있으니까.”


이전 04화삭풍이 겨울나무를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