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의 사랑

by 화진


여느 협상의 자리 같았으면 승자의 미소를 지을 타이밍이었지만 소혜 여사의 표정에는 웃음기라고는 없었다. 오히려 씁쓸해 보였다.


제안. 라한은 할머니의 제안에 대해 생각했다. 들으나마나 그가 이미 거절한 바 있는 사안, 현재 골프 클럽인 스노우베어를 자연으로 되돌리는 일을 맡아 달라는 것일 터였다.


“스노우베어 문제, 맞죠? 말씀하신 그 제안이라는 거요.”


“그래, 그거다. 방금 본 박 변호사하고 스노우베어의 김 상무가 실무는 거의 다 이끌어 가기로 얘기가 되어 있다. 그러니 네가 그걸 맡아도 바이올린 만드는 일은 계속 할 수 있어. 내 평생의 안목을 걸고 말하는데, 유능하고, 믿어도 되는 사람들이야.”


“그렇다면 저 두 분께 완전히 일임하셔도 되지 않을까요?”


“업무적으로는 거의 그렇다고 했잖니? 하지만 저들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가치관과 신념에 맞는 일거리를 찾은 것뿐이란다. 이 일은 누군가에게는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엄청난 재산을 내버리는 그것도 돈 들여서 내버리는 미친 짓으로 생각될 일이야. 그러니 끝까지 제대로 해내려면 구심점이 되어 책임을 질 확고한 주인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라한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한탄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지금 가장 부적합한 사람에게 강요하고 계신 거라고.


“다 살아서 언제 갈지 모르는 노인은 안 돼. 욕심에 눈멀어서 이 늙은이 죽고 나면 딴 생각 할 인사도 안 되고. 가족들의 성화에 마음 약해질 인사도 안 되고.”


소혜 여사는 라한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콕 콕 짚었다. 그녀의 기준에서 자신을 비롯한 직계 가족들은 모두 부적격자였다.


“욕심은 없고, 고집은 세고, 죽을 날 가까운 할미하고 약속이라는 걸 하게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어기지 않을 고지식함과 결벽함이 있고. 그게 너다.”


그러니 이 일은 네가 가장 적임자일 수밖에. 소혜 여사는 신뢰와 확신을 담아 라한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리고 너는 지금 내가 가진 정보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 우린 양쪽이 다 만족하는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얘기야.”


“제가 아무리 애원해도 그냥은 알려주지 않으실 거란 말씀이죠?”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라한이 물었다. 마지막으로, 기대 없이.


“말했잖니, 거래를 하자고. 너에게는 불행일지 모르겠다만 네 할미는 생겨먹기를 이렇게 생겨먹은 사람인 걸 어쩌겠니.”


목적을 위해서라면 손자의 사랑조차 거래의 목록에 올릴 수 있는 사람. 소혜 여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 입장에서는 정떨어지고 경멸스러울 수도 있겠지.


“이 봉투 안에 네가 원하는 정보가 있다.”


아까부터 줄곧 팔 아래에 두고 있던 봉투를 가리키며 소혜 여사가 말했다.


“나도 열어보지 않았어. 만약,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네가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이 봉투는 이렇게 봉인된 채로 바로 폐기할 작정이다.”


서랍 안에 복사본이 한 부 있었다. 소혜 여사는 라한이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복사본까지 동시에 폐기할 것이고, 라한이 거래를 받아들이면 복사본은 자신이 열어 볼 예정이었다.


“여기 오면서부터 저한테는 선택권 같은 건 없었어요. 주세요, 그거.”


문비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애초에 라한으로서는 그 어떤 제안도 거부할 수 없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잠깐 기다리거라.”


소혜 여사는 박 혜욱 변호사에게 전화했다.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아 혜욱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 서류를 라한에게 내밀었다.


“너도 모르지 않겠지만 할미가 워낙 확실한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여기 서명날인하렴.”


체념 상태로 라한은 여러 서류에 서명날인했다.


“세금 문제를 비롯해서 모든 절차는 박 변호사가 알아서 처리해줄 테니 앞으로 궁금한 게 있든 어려운 일이 있든 다 박 변하고 상의하거라.”


소혜 여사가 일찍이 라한의 몫으로 사 두었던 그림들과 건물이 있었다. 이참에 그것들도 다 넘겨주는 거였다. 소혜 여사가 친구 소유의 갤러리 수장고에 위탁 보관해 놓은 그림들이 라한의 몫인 줄 모르고 기대를 잔뜩 품고 있는 첫째 손녀 은휘가 적잖이 실망하고 화내겠지만.


“송라한씨, 우리 앞으로 잘 해 봅시다. 난 라한씨 보자마자 마음에 들었어요. 아, 오해는 말아요. 잘생겼지만 내 취향은 아니거든요. 그리고 난 이미 결혼해서 아이도 있으니까. 웃기는 건 집에 있는 그 남자도 취향의 남자는 아니라는 사실이지만.”


혜욱이 스스럼없고 유쾌하게 나와서 라한도 조금은 부담이 덜어지는 기분이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런 방면으로는 아는 게 하나도 없고, 본업도 따로 있어서 별 도움이 안 될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걱정 말아요. 어차피 일은 나랑 김 상무님이 다 해야 한다고 회장님께서 미리 못을 박으셨어요. 그래도 본격적으로 업무 개시하면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출근해야 할 거예요. 너무 볶아치는 보스도 별로지만 감시감독 제대로 못하는 보스도 별로니까. 김 상무님이 정말 좋은 분이라서 업무 파악하고 진척 상황 챙기는 거 세심하게 도와주실 거예요.”


소혜 여사가 혜욱의 팔을 잡아당겼다.


“박 변호사야, 벌써부터 너무 겁주지 마라. 스노우베어 사업 정리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남았잖니.”


“네, 회장님.”


혜욱이 이마를 쓸며 시원스럽게 웃었다.


“자, 이거.”


팔 아래 두었던 봉투를 라한의 앞으로 밀면서 소혜 여사가 어서 가 보라고 눈짓했다. 라한은 봉투를 챙기고는 끄덕 인사하고 급한 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라한은 차 안에 앉아 봉투를 열었다. 확인하는 동안 그의 얼굴이 비탄에 젖었다.


모계로 유전, 시신경이 위축, 급성기, 안정기, 실명…….


결별을 선언한 문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녀로서는 최선의 사랑이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제 라한은 더더욱 이별을 수용할 수 없다. 그녀를 찾아서 어떤 식으로든 그녀의 곁에서 모든 걸 함께 겪을 것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그런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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