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춥고 어둡고 황량한 진창

by 화진


산골짜기 음지마다 채 녹지 않은 눈이 남아 있었다. 서쪽으로 기운 해가 잠시 구름 사이로 비어져 나오자 어둡던 잔설이 새하얗게 두드러졌다. 비록 짧게 지나가지만, 응달에도 환하게 반짝이는 순간은 있는 거였다.


응달이 숨기고 있는 빛의 시간. 어쩌면 그건 고독한 이들의 몫으로 주어진 위로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최근의 문비가 잠깐씩이나마 모든 걸 잊고 몰입하는 겨를이 있다면 자연의 섭리가 빚어내는 신비한 파편들을 발견하는 때였다.


해가 다시 구름 속으로 들어가고 나무들 사이로 흘러들던 레몬 색의 햇빛도 자취를 감추었다. 문비는 이만 발길을 돌린다. 토끼 꼬리보다 짧은 산속의 햇덧이 머지않았으니 이제 암자로 돌아갈 시간이다.


좁고 험한 급경사의 산길을 문비는 제법 능숙하게 되짚어 내려간다. 저만치 갈림길이 나왔다. 왼쪽으로 난 조금 넓은 오솔길을 따라가면 암자가 나오고 앞쪽으로 계속 가면 산 아래로 이어진다.


문비는 문득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세게 감았다가 떴다.


거기, 경사진 길에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이 길에 있을 수 없는,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람. 눈을 감았을 때 오히려 선연하게 보이는 남자. 그도 문비를 보고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가 문비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정말 그가 여기에 온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두 사람은 한참을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윽고 먼저 움직인 건 문비였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자박자박 걸어서 왼쪽으로 돌아 계속 갔다. 잠시 후 라한이 성큼성큼 그러나 침착하게 문비를 뒤쫓아 걸었다. 등산복 차림의 그가 쉽게 물러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확인이라도 하듯 배낭을 추슬러 고쳐 멨다.


완만하게 휘어지는 모롱이에서 문비가 멈추더니 뒤를 돌았다. 모롱이만 돌아가면 암자가 금방이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죠? 돌아가요.”


문비의 말은 담담하고 차가웠다.


“여기까지 온 이상 나 혼자 돌아가지 않아요. 같이 가요.”


라한의 대답은 부드럽지만 단호했다.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 자신을 그녀가 반기지 않으리라는 건 충분히 예상한 바였다.


“내가 명명백백하게 끝이라고 썼잖아요. 하아, 그런데 왜 이래요? 돌아가 달라고요. 사람 피곤하게 하지 말고.”


한 마디 한 마디가 라한에게 얼음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환영받지 못할 줄 알았으면서도 막상 닥치고 보니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아프고 쓰디쓰다. 저럴 수밖에 없을 그녀의 마음이 가늠되어서, 그래서 더.


“모르겠어요? 내가 왜 이러는지?”


망설임 끝에 나온 서글픈 목소리였다. 그 낮고 애절한 말이 문비에게는 우레가 되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설마, 안다고? 알고 온 건가? 내…… 눈에 일어나고 있는 일을?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알리고 싶지 않았는데.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이 남자에게만은.

당장은 아프더라도, 먼 훗날 그래도 아름다운 사랑이었노라 회상할 수 있는 기억으로 남고 싶었는데…….


문비는 비틀린 분노에 사로잡혔다.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그러나 그 뜨거움과 맹렬함으로 자신과 눈앞의 남자에게 상처를 내고 말 분노였다.


“뭐야, 내 뒷조사라도 한 거예요? 그런 건가? 무서워라. 그래서, 이 여자 참 불쌍한 여자구나. 동정심이 들었나요? 이 불쌍한 여자 내가 구제해 주자, 그렇게 마음먹으니까 자기 자신이 대단하고 훌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도취감이 아주 그만이던가요?”


새파랗게 질린 입술로 문비는 가시 돋친 말들을 뱉어냈다.


“억지 쓰지 말아요. 그럴 리 없잖아. 아닌 거 알잖아.”


격해지는 감정을 지긋하게 억누르는 라한의 눈빛이 안타깝게 흔들렸다.


“당신이 이렇게 나오면 내가 감격의 눈물이라도 줄줄 흘리면서 고마워할 줄 알았나요? 착각하지 말아요. 웃기지 말라고. 나 당신 사랑한 거 아니야. 갖고 논 거지. 아직 멀쩡할 때 남들처럼 번듯한 연애 사건 하나 만들어서 좀 즐기고 싶었던 것뿐이야. 당신 정도면 괜찮겠더라고. 아니 꽤 그럴듯했지.”


마음에 없는 거짓말들, 냉소로 가득 찬 모진 말들. 이 위악. 이 자리에서 당신을 돌려세울 수 있다면 난 얼마든지 당신을 기만하고 기꺼이 나쁜 년이 될 수 있어. 문비는 짐짓 가증스러운 실소마저 머금었다.


“그만해요. 그만하라고. 당신…… 그런 사람 아니야. 그렇게 위악을 떤다고 속아 넘어가거나 노여워할 것 같았으면 나,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요.”


라한의 심장은 부서질 듯 슴벅이고 아렸다. 이러지 말아요. 냉혹한 척 막된 척 하는 거 당신 스스로도 힘들잖아, 괴롭잖아.


“내가 어떤 사람인데요? 당신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잘난 체야? 나도 나에 대해 잘 모르겠는데? 위악은 무슨. 나 원래부터 이렇게 삐뚤어진 인간이었어요. 송라한씨, 나 당신 보고 싶지 않아요. 지긋지긋해. 그러니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이쯤에서 돌아서요. 가라고. 내 춥고 어둡고 황량한 진창에 당신 끌어들이기 싫어. 그러니 제발…… 이대로 돌아가 줘요.


문비는 필사적으로 냉랭하고 못되게 굴었다. 라한은 깊게 한숨짓고는 침묵을 택했다. 그의 슬픈 눈길만이 무언의 호소와 애원으로 문비의 마음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팽팽한 대치 속에 시간은 여지없이 흘러갔다. 마른바람과 함께 땅거미가 깔리면서 매서운 한기가 찾아왔다. 두 사람은 뺨이 시린 것도 아랑곳 않고 한 치의 양보 없이 고집스레 굳어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대치를 허문 건 공양주 보살의 목소리였다.


“날이 어두워지려는데 아기가 보이지 않아서…….”


낯선 남자와 심상치 않은 두 남녀의 분위기에 공양주 보살이 말끝을 흐렸다. 문비의 설명을 기다리던 공양주 보살이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들 가자. 날이 저물고 있잖니. 이런, 얼굴이 얼음장이야. 이러다 탈나지. 자, 얼른 가자.”


문비의 볼을 만져 본 공양주 보살이 손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문비가 겨우 발을 떼자 공양주 보살이 라한에게 어서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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