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과 공양주 보살은 문비에게 그랬듯 라한에게도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그를 암자의 내객으로 받아 주었다. 공양주 보살과 스님은 방을 라한에게 내어주고 법당에서 지내기로 했다.
단지 공손한 인사와 함께 이름을 밝히는 것만으로 소박하나 따뜻한 환대를 받은 라한은 어리둥절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다.
그는 이 암자가 옹달샘 같다는 생각을 했다. 마르지 않는, 넘치지도 않는, 넓지 않은 수면으로도 푸른 하늘까지 거뜬히 품어내는, 그런 옹달샘.
문비는 라한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의 말을 무시하고 그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라한은 문비에게 조심스럽지만 다정했고, 집요하게 말을 시키거나 쫓아다니는 일은 없었다.
라한은 당연하다는 듯 장작을 패고, 군불을 때고, 마당을 쓸었다. 물지게를 지고는 식수로 쓰는 샘물과 허드렛물로 쓰는 개울물을 넉넉하게 길어 날랐다. 그는 마치 암자의 불목하니로 들어온 사람처럼 부지런히 할 일을 찾아 했다.
운동 삼아 산에도 열심히 다녔다. 때로는 땔나무로 쓸 만한 마른나무를 모아 오기도 하고, 스님이 목어 만들기에 적합하다 싶은 나무토막이나 고사목의 뿌리를 주워 오기도 했다.
“자네도 하나 깎아 볼 텐가? 목어 말이야.”
커다랗고 깨끗한 고사목 뿌리를 라한이 목어 만들기 적합하게 잘라 법당으로 가져갔을 때 스님이 그를 불러들였다.
“가르쳐주시면 배워 보겠습니다.”
라한이 들어가 스님 앞에 앉았다. 스님은 빙긋 웃더니 말없이 목어를 깎기 시작했다. 스님의 손놀림을 라한은 유심히 관찰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스님이 도구들이 든 두루마리를 라한의 앞으로 밀었다.
한참 동안 나무 깎는 소리가 법당을 가득 채웠다.
“이렇게 수려한 목어는 처음이야. 얼핏 보기에는 그게 그거 같아도 내가 만든 것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군. 단순함 속에 정교한 아름다움을 심을 줄 알다니. 자네 혹시 나무 만지는 일을 하나?”
스님은 주름진 얼굴에 파안대소를 떠올리고 크게 칭찬했다. 라한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쑥스러웠다.
“실은, 현악기를 만듭니다. 주로 바이올린을요.”
“바이올린? 바이올린이라면 나도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이름 정도는 안다네. 어쩐지 나무 깎는 품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자네도 훌륭한 바이올린을 만들기를 바라네.”
“나름대로 노력하고는 있는데 정말 이거다 싶은 좋은 바이올린을 만들고 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건 그렇지. 그리고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세상이 몰라볼 수도 있으니. 어떻게, 바이올린 만드는 일은 즐겁나? 그 일을 좋아하나?”
“물론입니다.”
“그럼 됐어. 할 수 있을 거야. 특별히 내가 부처님께 축원도 올려 주지.”
“고맙습니다, 스님.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법당을 지나가다 문 밖으로 새어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문비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라한이 바이올린 제작을 제쳐두고 암자에 머물고 있는 것이, 그렇게 바이올린 만드는 일에서 멀어져 있는 날이 하루하루 늘어가는 것이, 덜컥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크레모나 트리엔날레가 내년이었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바이올린 제작 콩쿨로 후년에 열리는 미텐발트 바이올린 제작 콩쿨과 함께 라한이 기다리는 콩쿨이었다. 크레모나 대회는 3년에 한 번, 미텐발트 대회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것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문비의 손이 주머니 속에서 바이올린 부속품인 나무 조각을 꽉 움켜쥐었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라한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에 문비는 새삼 조바심이 들고 애가 탔다. 그를 바이올린에게로 돌려보내야 했다.
그러나 무슨 수로? 함께 돌아갈 게 아니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완강하게 버티는 사람을 어떻게?
기묘하게 평화로운 암자의 나날이 또 며칠 흘렀다.
답답한 마음을 안고 산길을 걷던 문비는 뒤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를 들었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따라오지 말아요. 혼자 걷고 싶으니까.”
“따라가는 거 아니에요. 나도 항상 이 시간에 산에 오르곤 했어요.”
저만치 떨어져서 오던 라한이 억울함을 담아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암자로 되돌아가죠.”
문비는 거칠게 몸을 돌려 아래쪽으로 걸어 내려갔다.
“같이 올라가요. 보여줄 게 있어요.”
옆을 스쳐가는 문비의 팔을 라한이 가볍게 잡았다. 문비가 매정하게 뿌리치고 다시 걷자 라한은 재빨리 문비의 앞으로 가서 진로를 막아섰다.
“무상이가 왜 밥만 먹고 다시 산으로 가는지, 무상이가 가는 곳이 어딘지 궁금하지 않아요?”
“안 궁금해요.”
“또 거짓말.”
“무상이가 가는 데가 어딘지 정말로 알아냈다고요?”
내내 쌀쌀맞던 문비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진 것은 라한을 설득해볼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를 집으로, 그가 아끼는 바이올린과 바이올린이 될 나무도막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알아냈어요. 그리 멀지는 않아요. 마지막에 험한 수풀 속을 좀 헤치고 나아가야 하긴 하지만. 가보면 알 수 있어요. 왜 무상이가 한사코 거기로 돌아가는지를.”
“혹시 무상이가 그쪽한테는 가까이 오나요?”
문비는 일부러 라한씨라는 호칭 대신 그쪽이라고 불렀다. 거리감을 부각시키려는 의도였다. 결론적으로 라한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한테도 역시 일정 거리 안으로는 다가오지 않아요. 어제 산을 오르다가 수풀 사이로 무상이가 가는 게 보이기에 따라가 본 거예요. 몇 걸음 떨어진 채로 따라가니까 무상이가 화는 안 내더라고요.”
“솔직히 궁금하긴 했어요.”
문비가 산 위쪽을 향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