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하게 갠 오전, 햇볕이 겨울 소나무 사이로 노랗게 비쳐 들었다. 추위만 잘 대비하면 산에 오르기 괜찮은 날이었다.
가파른 길을 거침없이 척척 올라가는 문비의 뒤를 라한은 말없이 따랐다. 고집스러우리만치 씩씩한 뒷모습이지만 그를 아프게 하는 씩씩함이었다.
중도 실명이라는 게 남의 일로 입에 담기는 쉬워도 막상 자신의 일로 맞닥뜨리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건 자신을 둘러싼 세계가 바뀌는 일이다. 지금까지의 삶을 하루아침에 빼앗긴 채 완전히 생경하고 두려운 삶 속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것이다. 낯선 세계와의 충돌과 충격 그리고 적응은 오롯이 혼자 감당할 몫인 것이다.
그래도, 함께 그 세계에 들어가지는 못해도, 당신의 곁에 내가 있을게요. 늘, 항상, 언제나. 당신이 손을 뻗으면, 그 손이 닿는 곳에 내가 있을 테니까.
그녀의 등에서 어른거리는 햇빛의 파편들을 보면서 라한은 마음의 말을 전했다. 언젠가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육성으로 이 말을 들려주는 날이 올 거라고 그는 믿었다. 그 희망이 그로 하여금 모든 걸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웃음을 잃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거기 멈춰 봐요. 이제부터는 이 길이 아니에요.”
라한의 말에 문비는 멈춰서 이제야 뒤를 돌아봤다. 눈을 제대로 마주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를 힐긋 보았다.
“이 길이 아니면요? 이 길 말고는 길이 없잖아요.”
“이쪽이에요.”
라한이 오른쪽으로 돌아섰다. 거기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진 숲이었다.
“길이 나 있었던 곳은 아니지만 나무 사이로 사람 하나 정도는 어떻게든 지나갈 수 있어요.”
문비를 향해 말한 라한이 성큼 그리로 들어서서는 문비를 위해 잡목의 늘어진 잔가지를 팔로 밀어 치워 주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데로 들어와 볼 생각을 한 거예요?”
“여기, 이걸 봐요.”
“아아. 덜꿩나무네요.”
“어느 날인가 여길 지나다가 나무 사이로 빨간 열매들이 보여서 들어와 봤어요. 자세히 보니 공양주 할머니께서 가르쳐주신 덜꿩나무 열매더라고요. 저쪽을 봐요.”
여러 종의 나무에 드문드문 섞인 덜꿩나무에는 여태 가지에 남은 열매들이 마치 콩알전구라도 켜 놓은 듯 붉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 중 마지막 나무를 라한이 가리켰다. 그 너머로 빈터 같은 곳이 있는 것 같았다.
“조심히 와요.”
라한이 나무 사이로 잔가지를 치우며 요리조리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문비도 요령껏 잘 따라갔다.
마침내 숲속을 빠져나와 말라 버린 풀숲과 칡덩굴로 뒤덮인 빈터 앞에 선 문비는 방금 지나온 경로를 되돌아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 있는 편한 길만이 길은 아니라는 생각.
“뭘 그렇게 생각해요?”
거의 소곤거리는 정도의 작은 소리로 라한이 물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문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기, 바위와 바위 사이에, 보여요?”
좁은 풀밭 저편으로 라한이 말하는, 두 개의 바위가 만나 생겨난 우묵한 공간이 보였다. 그리고 세상에! 그곳에 떠돌이 개 무상이가 있었다. 머리를 이쪽으로 두고 검은 몸은 약간 호를 그리면서 길게 누운 채였다.
무상이의 눈은 낯익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고 평소보다는 조금 경계의 눈빛인 듯했다. 그러나 공격성이나 사나움과는 다른 성질의 경계라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무상이네요. 근데 무상이 옆에…….”
낯빛이 흐려진 문비가 얼마 만에 처음으로 라한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무상이 옆에는 희끗희끗한 것들이 흩어져 있고 무상이는 그것들을 감싸는 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맞아요. 무상이 없을 때 조금 더 가까이 가서 보고 확인했어요. 뼈예요. 강아지들의 뼈. 세 마리였어요.”
무상이의 경계심 속에 엿보이는 기색이 무엇인지 문비와 라한은 알 것 같았다. 깊고 긴 슬픔이었다. 그 슬픔이 사무쳐 와서 두 사람은 가슴이 먹먹하고 서글펐다.
어떤 곡절인지 얼마나 오래 된 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무상이가 그 동안 새끼들 곁을 지켜 왔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지난 번 폭설처럼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면 무상이는 늘 돌아가곤 했고, 돌아간 곳이 여기였던 거다. 제 새끼들이 있는 곳.
떠돌이 개의 진실은 단순했다. 단순하지만 지극한, 모성애였다.
문비는 고개를 돌려 하늘을 봤다. 눈에 그렁하게 차오른 눈물을 애써 삼켰다.
라한은 일부러 그녀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녀가 눈물 차오른 눈을 보여주기 싫어할 것을 알기에 줄곧 무상이만 보고 있었다. 그의 온기 어린 시선을 오래 받고 있던 무상이가 경계심을 풀고 눈을 감았다.
“이제 그만 가요.”
이윽고 문비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괜히 보여준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문비씨 마음만 아프게.”
산을 내려오다 라한이 후회스러운 듯이 말했다.
“아니. 마음은 아프지만 괜히 봤다는 생각은 안 해요. 무상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됐으니까. 그것보다, 이제 그만 돌아가요. 이만큼 했으면 됐어요.”
“이만큼 했으면 됐다는 말은…… 아니, 그냥 안 들은 셈 치죠. 나, 혼자 안 돌아가요. 여기 평생을 있어야 한다 해도 그게 당신 때문이라면 기꺼이.”
“이러지 말고, 가서 송라한씨 삶을 살아요. 나 때문에 여기 이러고 있으면 있을수록 나로서는 송라한씨를 망치고 있다는 죄책감만 커져요. 그 죄책감 때문에 내가 나 자신을 더욱 더 미워하기를 바라나요? 원하는 게 그런 거예요?”
“내가 원하는 건 당신 옆에 있는 거예요. 내 삶을 살라고요? 내 삶은 이미 당신하고 따로 떼어서 성립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는 거예요. 나름대로 열심히. 지금 이 순간에도.”
“진심으로 부탁할게요. 제발 돌아가요. 그렇게 내 짐을 좀 줄여줄 수 없어요? 당신까지 이러지 않아도 난 이미 넘치게 무겁고 충분히 버거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