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문비의 머리카락을 뺨 위로 어지러이 흩뜨려 놓고 지나갔다. 라한이 그녀의 얼굴로 손을 올리려는데 그녀가 자신의 손으로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치우고는 고개를 돌렸다. 외면하는 그녀의 심경이 투명하게 와 닿아서 라한은 머나먼 우주의 고립된 행성처럼 쓸쓸해졌다.
그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은 건 사랑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를 사랑하는 사람과 대립하게 만드는 것도 사랑이었다. 사랑 그 하나로 이 갈등을, 그녀가 겪는 압박과 고충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나? 모든 걸 정당화할 수 있나?
라한은 스스로의 내부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사랑에 확신이 있다면, 자신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그녀에게 숨 쉴 수 있는 틈을 좀 내어줄 수 있지 않나? 이제 그녀도 잘 알 테니까. 자신이 어떤 마음 어떤 결심으로 그녀에게 왔는지를.
하지만 그의 안에는 두려움 또한 존재했다. 그녀가 또 다시 그가 모르는 아득한 곳으로 숨어 버리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를 외면한 채로 문비가 말을 이었다.
“난요, 이기적인 사람이라서 내 속 편한 것만 생각해요. 내가 누군가를 망치고 있다고 느끼는 게 정말이지 싫어요.”
“지금의 나에게 가장 두려운 게 무엇일 것 같아요?”
온화함과 침착함을 되찾은 라한이 간절하게 물었다. 문비는 답하지 않았다. 알지만 말할 수 없었다.
“두 가지만 약속해 줄래요? 그럼 당신이 시키는 대로 돌아갈게요.”
“우선 들어나 보죠.”
“나 모르게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줘요. 한 번 더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망가지고 싶지 않아도 망가지고 말 것 같으니까.”
“협박으로 들리네요.”
“방금 한 말이 당신에게 협박일 수 있다면 나로서는 기쁜 일이죠.”
“그리고 또?”
“전에 약속했던 겨울 여행, 가는 거예요. 우리 함께. 부담스럽게 하지는 않을게요. 나를 그냥 가이드라고 쳐요. 그렇지만 꼭 같이 가 줘요. 당신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것이, 들려주고 싶은 것이 그 여행에 있어요.”
문비의 시선이 천천히 다시 라한의 눈으로 향했다.
그녀에게는 고요함과 시간이 필요했다. 가혹한 진실 때문에 멀어지고 틀어진 자기 자신과 화해할 시간. 두 엄마에 대한 얼크러진 감정을 가다듬고 풀 시간. 계속 살아가기로 한다면, 실명 이후의 삶에 대한 자세를 정할 시간.
“나도 조건이 있어요. 내 조건을 수락하지 않으면 당연히 나도 약속 못해요.”
“말해 봐요.”
“여행을 다녀오는 시점까지예요. 약속의 유효 기간. 그 이후에 내가 당신을 안 보겠다고 하면 그것으로 정말정말 끝. 영영 끝. 그렇게 해줄 수 있어요?”
사실 문비에게 그의 대답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비는 지금 스스로에게 관대한 유예 기간을 주는 것이었다. 그 사이에도 자신의 의지가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면,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게 옳은 방향이기 때문일 터였다.
라한은 문비의 눈빛에서 결코 외부로부터는 허물 수 없는 결기를 읽었다. 다행히 그 눈에는 결기만 담겨 있지 않았다. 극히 미량이기는 하지만 호기심과 기대가 남아 있었고, 이것이 라한에게는 그나마 의지 삼을 유일한 가능성으로 해석되었다.
“알았어요. 그럴게요.”
쉬이 대답하지 못하던 라한이 마침내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그는 비상을 배우기 위해 둥지로부터 몸을 던지는 새끼 새의 심정을 떠올렸다. 비슷하지 않을까? 희망도 절망도 전제하지 않은 채 전부를 건다는 점에서.
“그래요. 오늘 점심 먹고 바로 돌아가세요. 여행 일정은 확정되는 대로 보내 줘요. 겨울 왕국이라고 했으니 해외일 테고, 그럼 공항에서 만나면 되겠죠?”
문비가 지체 없이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라한은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길을 내려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잣나무 위의 청설모가 물끄러미 배웅했다. 겨울이 깊은 숲의 적막을 청설모가 떨어트린 마른 잣송이가 은은하게 흔들었다.
약속대로 두 사람은 공항에서 재회했다. 1월이 거의 끝나가는 어느 날이었다. 라한은 문비에게 비행기 출발 시각과 두 사람이 공항에서 만날 시간 및 장소 외에는 아무것도 미리 알려주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티켓을 확인한 문비가 눈이 동그래져서 라한을 올려다보았다. 라한은 ‘보시다시피’라는 의미로 엷은 미소와 함께 어깨를 작게 한 번 으쓱였다.
오슬로라면 문비도 라한이 그녀를 처음 보았다는 공항 내 카페가 생각나지 않을 수 없었다.
뭐, 나쁘지 않겠지. 다시 한 번 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이번에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아니라 동행으로.
“도대체 우리 목적지가 어딘데요? 혹시 내가 가보고 싶다던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 아니면 오슬로를 경유해서 갈 수 있는 어느 오로라 스팟?”
문비의 어조가 제법 산뜻했다. 그녀는 마음먹었던 것이다. 여행을 하는 동안만큼은 침울하거나 무겁지는 말자고. 어차피 변하는 건 없겠지만.
“둘 다 틀렸어요.”
차갑지도 어둡지도 않은 문비의 태도에 라한의 기분도 한층 밝아졌다. 비밀스럽게 고개를 가로젓던 라한이 덧붙였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고도 갈까요? 안 될 거 없잖아요?”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요. 어딜 가서 무얼 보고 들을 건지, 진짜 안 가르쳐 줄 거예요? 도대체 왜?”
“재밌잖아요.”
“난 하나도 안 재밌는데?”
“내가 재밌다는 말이었는데.”
둘은 가볍게 마주 웃다가 조금은 어색하게 표정을 얼버무렸다. 아주 잠깐 아무 일 없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던 웃음은 달곰씁쓸하면서도 아릿한 여운으로 흩어졌다.
어쩌면 이런 순간이, 느닷없이 수시로 찾아올 이런 순간이야말로 두 사람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번 여행의 맹점인지도 몰랐다.
“잊지 말아요. 그쪽은 그저 가이드일 뿐이라는 거.”
라한이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문비가 일부러 선을 그었다. 그녀에게 이 여행은 어디까지나 유예의 시간일 뿐이었다.
“물론이죠. 가문비씨, 라한 투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전에 문비가 했던 말을 흉내 낸 라한이 그녀의 캐리어까지 끌고 앞장서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