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악기

by 화진


오슬로 공항의 그 카페 그 자리를 거의 일 년 만에 다시 찾은 문비는 고개를 들어 창 너머를 바라보았다. 혼잡하지는 않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고 그들에게서는 대개 여행자 특유의 활기가 배어났다. 처음이 아닌데도 낯설게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작년 2월에 여기 앉아 있었을 때를 돌이켜 보노라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거라곤 그저 어둠뿐이었다. 소리도 냄새도 색채도 없는 기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의 문비는 막 엄마와 사별한 참이었고, 아득한 상실감 앞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문비가 묘한 감회에 빠져 있는 사이 라한이 커피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문비는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셔 보았다. 특색이랄 것이 없는 흔한 맛의 카페라떼였다.


“나는 상상해 본 적이 있어요. 여기서 당신을 봤던 순간으로 되돌아가는 상상.”


라한이 아까 문비가 보던 풍경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그 상상에선 나를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을 거나요?”


“네, 무슨 말이든. 하다못해 펜을 떨어뜨리셨네요, 하는 말이라도. 물론 그 전에 바닥에서 펜을 주워 올리는 척 해야겠죠. 당연히 그 펜은 내가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고.”


“진부하고, 시시하고, 유치해요.”


“그래요. 그래서 당신은 나를 향해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죠.”


“맞아요. 그러고서 나는 황급히 여기서 나가 버려요. 이상한 사람하고 엮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매정한 전개네요. 하지만 괜찮아요. 어차피 우리는 몇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살구꽃 아래에서 재회하게 되어 있는 운명이니까.”


문비는 더 말을 얹지 않고 커피를 홀짝였다. 맛이야 어떻든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목으로 넘어가 뱃속을 데워주는 느낌은 포근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두 사람은 오슬로에서 비행기로 한 시간쯤 걸리는 베르겐에 도착했다. 극야의 계절답게 이른 저녁임에도 시각적으로는 야경이 한창이었다. 불이 밝혀진 고색창연한 거리는 그대로 한 폭의 풍경화가 되고 얼어붙은 눈이 설탕처럼 달콤하게 반짝였다.


떠나기 전에 문비는 가급적이면 게으르고 한가한 여행이기를 원한다고 못 박았고, 라한은 가이드로서 그녀의 요구에 충실했다.


베르겐의 호텔에 여장을 푼 두 사람은 호텔 내 레스토랑에서 만나 저녁을 먹고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다음 날 조식을 먹으면서 라한이 물었다.


“그리그가 살았던 집인 트롤하우겐 가 볼래요? 아니면 뭉크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는 베르겐미술관을 가도 되고. 케이블카 타고 플뢰위엔산에 올라가서 이 도시의 전체 경관을 감상하는 건 어때요?”


“우리가 여기에 온 이유, 나에게 보여주고 싶고 들려주고 싶다는 그건 몇 시 예정인데요?”


“저녁 일곱 시.”


“그럼 트롤하우겐이랑 미술관이요.”


문비의 결정에 따라 두 사람은 오전에 트롤하우겐을, 점심을 먹고 나서는 베르겐미술관을 느긋하고 조용하게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저녁 6시 40분에 그들이 들어선 곳은 베르겐 도심에 있는 그리그홀이었다.


“아이스 뮤직…… 이란 말이죠?”


연주회 포스터를 본 문비의 까만 눈동자에 윤채가 돌았다. 그 호기심과 흥미의 빛을 포착한 라한의 눈에도 희망과 긴장의 빛이 일렁였다.


“오늘 연주회의 기획자이면서 연주자 중 한 사람인 테르예 이숭셋. 아이스 뮤직이라는 분야를 처음 개척한 사람이에요. 빙하 동굴에서 연주회를 한 적도 있어요. 근데 이 사람, 음악 공부를 독학으로 했다네요.”


홀 안으로 들어가면서 라한이 설명했다.


“우와, 대단한 사람이네요.”


자신들의 좌석으로 가기 위해 통로를 걸어 내려가던 문비가 라한을 돌아보며 작은 소리로 놀라움을 표했다.


무대에 악기들이 세팅되자 문비는 아이스 뮤직이라는 말을 우선 눈으로 실감했다. 전부 두꺼운 얼음을 깎아 만든 것들이었다. 하프, 실로폰을 닮았지만 간소한 퍼커션, 단순한 모양의 호른, 커다란 콘트라베이스가 파르스름하고 은은하게 빛났다.


“인공으로 얼린 얼음은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아서 아이스 뮤직에 쓰이는 얼음들은 다 자연에서 채취한대요. 어때요, 상상이 돼요? 저 악기들이 어떤 소리 어떤 연주를 들려줄지?”


라한이 소곤소곤 묻자 문비는 상상해 보려 애썼다. 얼음으로 된 본체에 현을 맨 하프나 콘트라베이스는 원래 악기의 소리와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데 순전히 얼음으로만 된 퍼커션과 호른의 소리는……?


문비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윽고 난생 처음 듣는 곡의 연주가 시작되고 문비는 지금껏 알지 못했던 신비로운 음에 차츰 빠져들었다. 연주가 계속될수록 얼음 악기들은 알게 모르게 조금씩 녹고 있었고, 악기의 음색과 울림은 서서히 변해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문비는 어느 시점부터 미세한 음질의 차이를 감지했다. 착각이거나 환상이어도 상관없었다. 맑고, 편안하고, 생동감 있는 선율이었으니까. 아름다웠으니까. 한 음 한 음이 마치 살아서 날아다니는 정령 같았으니까.


아이스 뮤직이란 같은 연주를 두 번 다시는 할 수 없는 음악이었다. 얼음 악기는 재사용이 불가했고, 세상의 모든 얼음은 어는 속도나 기포의 정도 즉 품질이 다 다르기 때문이었다.


음을 빚어내는 동안에도 사라지는 중인 얼음 악기, 그러나 악기가 다 녹아 없어져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선율. 사라짐과 기억됨의 연주 사이에서 문비는 불현듯 아직은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온기 어린 손, 눈빛, 사랑으로부터. 삶의 사소한 지점에서 발견하거나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그리고 자신이 만들어낼 수도 있는 아름다움들로부터. 유리되어 사라지고 싶지 않다고. 눈을 감아도 이토록 명징하고 다채롭게 빛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다시 꿈꿀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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